JH안소니백세건강노트 :: '세계사속으로2' 카테고리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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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속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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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 사바나지대의 농업

 

 

 

 

 

 

 

 

 

니제르강은 기니의 남부 고원 지대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흘러가 사하라 남쪽으로 흘러가며 다시 남동쪽으로 물줄기를 바꾼다.니제르강은 길이가 4200킬로미터로 아프리카에서 세번째로 큰강이다. 말리와 니제르를 거쳐 나이지리아를 통해 기니만으로 흐른다.말리와 니제르와 같은 건조기후 국가들에게는 생명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강이다. 니제르강은 폭도 매우 넓다.비행기를 타고 강을 내려다보면 수천킬로미터나 펼쳐져 있다.바다도 아니고 강도 아닌 지면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황색 줄기가 되어 나타나고 있다.산 모양으로 흐르는 강의 꼭대기에 통북투가 있다.통북투는 옛날부터 대상들의 근거지였다.상인들은 이 곳에서 출발하여 이 곳으로 돌아왔다.대상들이 이 곳을 비우는 동안 통북투라고 불리는 여인으로 하여금 살게 했다는 것이 이 도시 이름의 시초였다고 한다.통북투란 " 큰 배꼽의 어머니"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통북투가 가장 번창한것은 14세기경 이다.이 무렵의 통북투는 말리왕국의 도시가운데 하나였다.말리왕국이전에는 가나왕국이 있었다.13세기경에 몰락해버린 가나왕국을 대신해서 말리왕국이 강대하게 된 것이였다.가나왕국은 사하라사막 남쪽의 아프리카에서 탄생했으므로 최초의 아프리카 왕국으로 여겨지고 있다.가나왕국의 성립은 4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당시에 가나왕국에서는 농업이 행해졌고 소금과 금거래로 큰 이익을 올렸다.가나왕국이 강력해진 것은 바로 제철기술이었다.세계에서 철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은 지금의 터키공화국 부근에 살던 히타이트인이었다.그러나 서아프리카 사람들의 제철기술은 다른 나라에서 전수된 것이 아니고 그들만의 독창적인 기술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또한 니제르강 중류의 사람들은 기원전 4000년 경 부터 식물을 재배했고 그때 처음으로 농사를 짓는 니제르문명을 낳고 가나왕국과 말리왕국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돠었다.

 

 

 

 

 

 

 

 

 

 

 

 

 

사하라사막의 남쪽에서 시작된 아프리카 농업은 사하라사막의 서쪽으로 대서양 해안의 세네갈에서 동쪽으로 수단까지 이어진 사바나지대까지 연장되었다.사바나지대에서는 수수.기장.피 같은 작물을 재배했고 이디오피아에서는 테프라는 잡곡을 재배했다.수수의 재배종은 야생수수보다 훨씬 크다.아프리카 사람들은 몇천 년의 세월에 걸쳐서개량해 왔다.이와같이 아프리카대륙의 농업은 아메리카대륙이나 아시아 .동남아시아와 견주어 독자적으로 농업을 시작한 곳이다.아프리카의 사바나 농경문화가 낳은 하나의 걸작은 참기름이다.식물의 씨를 모아서 기름을 짜낸 이것은 씨를 먹는 방법으로 매우 훌륭한 방법으로 이전에 없는 대발명이었다.참기름은 동쪽으로 전해져 인도.중국.한국.일본 등으로 전해져 하나의 생활문화로 정착하게 된다.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시작된 농업은 인도에 전해져 서인도 사바나지대에서도 행해졌다.여기서는 조.수수가 재배되었고 중국 항하유역으로 전파되었다.서아프리카에서는 벼도 재배했다.그러나 아시아 벼와는 다르다.아프리카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재배한 것이다.그렇다면 아시아의 벼농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벼농사는 인도나 중국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중국의 양자강 하구 부근에 있는 유적에서 돼지와 물소의 뼈와 함께 벼가 발견되었다.이 유적은 기원전 4700년 경으로 벼농사를 중심으로 양자강 유역에서 문명이 꽃을 피운것으로 보고 있다.그러나 벼농사는 양자강부근이 발상지가 아니고 훨씬 그 이전의 다른 곳에서 재배된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정확하게 확인되고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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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원주민 인디오와 재배작물

 

 

 

 

 

 

 

 

 

 

 

감자와 고구마의 원산지는 아메리카대륙이다.남아메리카의 안데스산맥은 태평양을 따라 길게 뻗어 있다.이 안데스산맥  중앙부는 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해발 5천에서 7천미터나 되는 산들이 쭉 뻗어 있다.그 사이에 해발 4천미터의 광대한 고원지대가 펼쳐져 있다.현재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는 그 가운데 해발 3,632미터에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도이다.볼리비아와 페루에 걸쳐 큰  호수 티티카카가 있다.이 티티카카 호수는 해발 3,810미터에 있으며 무척이나 넓다.티티카카 호수의 남쪽에 티아와나코의 유적이 있다.이 유적에는 농사짓던 흔적.돌로만든 신전.조각이 남아 있고 토기.청동으로 만든 칼과 도끼가 발견되었다.토기에는 감자의 모양.줄기.잎을 그린 그림이 새겨져 있다.이곳에서 감자가 재배되었다는 증거이다.이 티티카카의 문화는 서기 600년에 가장 번창한것으로 짐작되지만 그 재배의 기원은 기원전 4000 년 경에서 3500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한편 고구마는 기원전 3,000년 경에 멕시코에서 재배되기 시작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감자와 고구마는 땅속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서.언제부터 재배되었는가를 단정짓기는 매우 어렵다.그러나 야생종 고구마가 그곳에 없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개량하고 재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감자는콜롬부스가 아메리카에 온 15세기말에 중남미의 멕시코에서 남미의 칠레 남부에 걸쳐 재배되고 있었다.이 무렵에 유렵인중 워터 롤리라는 사람이 영국에 고구마를 가져가고 이어서 스페인 사람들이 감자를 유렵으로 가져갔다.특히 경작할 토지가 부족했던 아일렌드에 감자가 재배되기 시작한 시기는 16세기 말경이고 아일랜드 전역에 펴져 농민들의 주식이 되었다.아시아에 고구마를 들여온 사람들도 스페인 사람들로 추정되고 있다.1594년 중국 상인 진진룡이 루손섬에서 고구마를 중국으로 전해져 재배되기 시작했다.아메리카대륙에서 재배되어 가장 큰 역할을 한 농작물은 옥수수이다.수확.저장.먹는 법과 영양가에서 옥수수는 훌륭한 농작물이다.기원전 4800년 경에서 기원전 3500년 경 멕시코에서 야생종 옥수수가 처음으로 인간의 손에 의해 재배되었다.

 

 

 

 

 

 

 

 

 

 

 

 

 

 

 

 

 

 

 

 

다른 대륙에서 아메리카대륙으로 사람이 가지 않았다거나 갔더라도 이 작물등을 유렵.아시아.아프리카에 가지고 가지  않았다면 오늘날 전세계에 옥수수는 전파되지 않았을 것이다.이외에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재배된 농작물은 토마토.땅콩.고추.아보카도.호박.파인애플.카카오 등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이 개량하고 재배되어 오늘날 세계인들이 즐겨 찾는 식품이 되었다.미주대륙의 농경은 미주대륙 이외의 어떠한 영향을 받지않고 자체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를 최초로 이룬 사람들은 원주민이었다.이때의 최초의 원주민은 인디오라고 불리고 있다.미주대륙에서 인류가 발생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최초의 원주민은 아시아 대륙에서 건너간 것으로 보고 있다.지금부터 3만5천년 전부터 1만년  사이에 현재의 베링해협은 육지였으며 두개의 대륙은 연결되어져 있을 때  시베리아 툰드라지대에서 카리부와 메머드 등의 동물을 쫓아 미주대륙으로 이동했던 수렵인으로 보고 있다.멕시코 교외의 땅 속 2미터 지점에서 매머드의 뼈가 발견되었다. 그곳은 옛날에는 호수였다.이 메머드의 가슴에 길이 6센티미터 폭 2.7미터의 돌로 만든 창끝이 꽂혀있고 주변에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촉과 돌칼 등이 흩어져 있었다.뼈에는 살을 도려낼 때 사용한 돌칼의 자국이 있었다.이 메머드의 뼈는 지금으로부터 1만년전의 유적이다.이 당시의 원주민들의 중요한 식량은 메머드.말. 야생소 등 대형동물들이 있었다.사냥도구로 타제석기를 사용했다.여러 모양의 아름다운 석기들로서 미주대륙만의 고유한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이후에 미주대륙의 자연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였다.물론 기후변화는 전세계적이었다.기원전 8000년 경부터 기원전 5000년 경에 걸쳐서 자연환경은 지금과 비슷하게 되었다.메머드같은  큰 동물들은 서서히 줄어들고 물이 풍부하던 곳이 반 건조지대가 되어갔다.따라서 수렵보다는 식물로 생활을 하게되고 농경이 시작되기 시작하였다.기원전 2000년에서부터 기원전1000년 경에  정착한 원주민들은 동으로 만든 기구를 사용하였다.농경사회가 발생한 수백 년이 지난 이후 거대한 계단 모양의 피라미드와 석상.조각품.신전을 건설하고 문화를 만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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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최초의 농경 씨없는 바나나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는 과일은 바나나이다.바나나의 영양가는 매우 높아 레몬.파인애플.딸기 등의 칼로리의 2배나 된다.이것은 쇠고기 칼로리의 절반에 가깝다.바나나의 단백질은 사과의 4배.지방은 오렌지의 3배.비타민A는 차(茶)나 당근과 같고 비타민B는 토마토.비티민C는 사과와 비슷하다.바나나에는 콜레스테롤이 없고 소화가 잘 된다.영양은 그야말로 과일가운데 최고이다.바나나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입에 넣으면 혀와 이빨에 닿는 것이 있다.귤의 알맹이와 같은 작은 씨이다.이 처럼 바나나에도 씨가 있는  바나나가 있다.그러면 조금은 특이한 바나나로 생각하게 되지만 원래 바나나에는 씨가 있었다.야생바나나에는 팥처럼 딱딱한 씨가 가득 들어 있었다.따라서 바나나를 통채로 먹을 수가 없었다.이런 바나나를 인간이 개량한 것이다.씨없는 바나나 재배에 성공한 사람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아마도 동남아시아 말레이반도 근처에 사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동남아시아의 열대지방은 월평균 기온이 18도가 넘고 1년 내내 햇빛이 내리쬔다.이곳은 더운 기온과 높은 습도로 둘러싸인 열대림이 무성한 열대우림지대이다.여기서 자라는 식물은 바나나.얌고구마.타로고구마같은 종류이다.이외에도 사탕수수.사고야자.빵나무 등이 있다.이곳은 유목생활의 세계나 북방의 삼림지대 또는 한랭지방의 수렵세계와는  다르다.동남아시아 밀레이반도 사람들은 기원전 13000년 경부터 기원전  9000년 경 사이에 바나나와 얌고구마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인간이 야생바나나에서 씨없는 것을 발견하여 재배하고 개량된것으로 보고있다.따라서 바나나의 원산지가 동남아시아이므로 최초의 농업의 발생지는 동남아시아로 주장하고 있다.동남아시아인은 자연에 있는 것 즉. 자연적으로 열매맺는것을 줍거나 따서 먹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좋은 품종을 선택하여 심고 길러 수확했다.즉 채집생활에서 농경생활로 나아간 것이다.따라서 바나나 재배가 인류 최초의 농경이 된다.바나나와 얌고구마는 말레이반도에서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의 동해안에 퍼졌다.이때가 기원전 1000 년  경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다시 바나나는 아프리카대륙을 횡단하여 서아프리카로 퍼져서 15세기에 아프리카 서해안에 나타난 유렵인이 대서양에 떠 있는 카나리아제도에 바나나를 퍼뜨렸다.그곳은 바로 작은 새 카나리아 원산지이다.다시 16세기 무렵에는 스페인인이 카리브해에 있는 섬 산토 도밍고에 퍼뜨리고 마침내 중남미의 파나마에 바나나의 뿌리가 옮겨갔다.지금은 남미의 브라질이 세계 최대의 바나나 생산지가 되었다.한편으로 바나나는 동쪽으로 인도네시아.필리핀.뉴기니.그리고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에서 섬으로 퍼져 여러 나라 사람들의 중요한 식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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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유라시아대륙 건조지대 유목민 

 

 

 

 

 

 

 

 

 

 

 

 

 

 

 

 

 

유렵과 아시아.아프리카는 모두 연결된 하나의 대륙이다.이 세 대륙을 합쳐서 아프라유라시아대륙 또는 유라프로아시아대륙이라고 한다. 아프로유라시아는 구대륙으로 간주되는 아프리카 .유렵.아시아대륙의 통합 명칭이다. 초대륙 아프로유라시아는 이를 하나의 대륙으로 취급할 경우 세계에서 가장 큰 대륙이다. 수에즈운하를 경계로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두 대륙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아프로 유라시아 대륙의 면적은 대략 8400만에서 8500만km²로 지구 육지 면적의 6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유라시아에 펼쳐진 초원지대는 몽고고원.중가리아.키르기즈초원.카자흐초원.우크라이나초원에서 폴란드와 헝가리에 이르는 광활한 건조지대이다.이 초원지대에서 남쪽으로 사막이 있다.바로 고비사막이다.동쪽으로는 몽고고원이다.서쪽으로는 쿤룬산맥과 텐산산맥사이에 레몬 모양의 타클라마칸사막.타림분지가 있다.텐산산맥 동쪽으로 해면보다 낮은 투르판분지가 있다.해면보다 150미터 낮은 곳이다.이곳은 절구의 밑바닥 모양을 한 곳으로 "아시아의 우물"이라고 한다.아주 더운 곳이기 때문에 옛부터 중국에서는 이곳을 화주( 火州)라고 불렀다.파미르고원 서쪽에서 보면 카차흐초원 남쪽으로 키질쿰과 카라쿰이 있다.터키어로 쿰은 사막이다.건조지대는 파미르고원 서남쪽 키질쿰과 카라쿰과 힌두쿠시산맥의 서남쪽으로 이어진다.즉 이란고원.아나톨리아고원도 모두 건조지대이다.아나톨리아는 현재 터키공화국이 있는 곳이다.다시 건조지대는 아라비아반도에서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사하라사막으로 끝없이 펼져져 있다.서남아시아의 건조지대는 중앙유라시아 초원지대와는 달리 페르시아만.아라비아해.홍해.지중해.흑해.카스피해에 접해 있다.카스피해에 면해 있는 지방은 강수량이 많다.강물이 흐르는 유역에 들러싸인 곳에서 일찌기 농경이 시작되었다.이 지역에서는 농경생활민과 유목민이 서로 접촉하고 교류를 해왔다.그러나 아프로유라시아의 건조지대는 절대적으로 유목민의 생활이 주를 이루었다.

 

 

 

 

 

 

 

 

 

 

 

 

 

 

 

 

 

 

 

 

 

 

 

인간은 원래 자연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취하며 생활해왔다고 생각되어 왔다.이런 생활을 채집.수렵생활이라고 한다.마침내 인간은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것을 취할 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을 직접 기르기 시작했다.인간이 해온 생활을 순서대로 말하지면 처음에 채집.수렵생활.다음에 농경.목축생활을 해왔을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그런 곳도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반드시 그러하지 않다는 사실도 밝혔지기 시작했다.서아시아에서 발굴된 유적에 의하면 기원전 7000년 경 농경과 목축은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한다.농경생활을 하면서 가축을 기르고 또는 가축을 기르면서 농경생활도 함께 이루다가 어느 시점에 농경생활을 버리고 가축과 함께 초원으로 들어간 사람들에 의해 유목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있다.유목생활을 처음에 시작한 곳은 서아시아의 이란과 아나톨리아고원에서이다.이후 시리아와 아라비아 등의 초원으로 이동한 듯하다.그 일부는 동쪽과 서쪽으로 이주하고 이어서 남부러시아.중앙아시아.몽고고원으로 진출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유목민은 생활 밑천인 가축의 고기는 되도록 먹지 않고 젖을 먹었다.그러나 우유가 나오지 않은 계절에는 고기를 먹거나 수렵으로 보충해 갔다.서아시아에서는 농경목축생활에서 유목으로 옮겨갔으나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는 북방 유라시아 수렵인이 유목민되었다는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기원전 3000년경 후반에는 유라시아 초원에서 마제석기를 사용하는 유목민의 흔적이 나왔다.기원전 1200년경부터 기원전 900년 경 서아시아의 유목민족이 청동으로 만든 고삐를  발명해 말고삐를 매었다.이때쯤해서 유목민은 말을 능숙하게 다루었다.말을 타게 되면서 종래보다 훨씬 기동력을 발휘하고 보다 많은 가축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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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사람들

 

 

 

 

 

 

 

 

 

 

 

 

말을 탄 사람 하나가 아득히 먼 지평선에 한 점이 되어 나타난다.그와 동시에 다른 한 점이 반대편 지평선의 한 모퉁이에서 나타난다.잠시 서로를 확인한 후 두 사람은 힘차게 약 30분을 달린다.이윽고 서로 만난 두사람은 말 위에서 힘껏 얼싸안고 나서는 말 안장에서 풀  위로 뛰어내린다.이것은 몽고인의 데이트 방식이다.광활한 곳에서 생활을 하면 그렇게 잘 볼 수 있게 되는 것일까?몽고고원은 끝없이 펼쳐진 녹색의 구릉지대이다.이곳은 짧은풀로 빽빽이 뒤덮혀 있으며 완만한 언덕이 이어져 있다.고원에 있는 바다처럼 펼쳐진 풀의 장관을 몽고말로 한가이라고 한다.영어로는 스텝이다.풀이 자라는 데 좋지 않은 건조지대를 몽고말로 고비라고 한다.고비초원을 걷고 있으면 대지가 은은한 향수를 흩뿌리고 있는 것처럼 좋은 냄새를 풍긴다.바람은 자고 하늘은 드높으며 하늘 한 귀퉁이에서 차츰 햇빛을받아 벌겋게 물들기 시작한 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몽고인들은 그 향기를 " 고비의 향기 "라고 긍지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한다.집게손가락 길이만한 부추 계통의 풀이 매우 수수한 엷은 자색의 꽃을 피우고 있다.그 풀이 주위의 땅을 온통 뒤덥고 그 줄기와 꽃은 아득히 먼 지평선 저편까지 퍼져있다.수억 송이나 되는 꽃이 향기를 내 풍기고 있다.우리가 알고 있는 무지개는 둥글고 커다랗고 색은 선명하게 네온사인처럼 빛나는 그런 것이다.그런데 이곳에서 떠 있는 무지개는 활모양을 그리지 않고 초원의 저쪽에서 큰 기둥처럼 우뚝 서 있다.한참 후에 다시 뒤를 쳐다보면 무지개는 넓은 하늘 가운데 한 모퉁이를 지나면서 멋진 활모양을 그린다.푸른 하늘의 나라인 몽고초원에서의 아름다움은 그저 경탄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몽고에서 야채를 즐겨 먹는 사람은 도시 생활인이거나 외국에서 생할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이다.시골에 가면 거의 고기만 먹는다.몽고인들이 즐겨먹는 고기는 양고기이다.몽고인들은 양고기에다 여러가지 재료를 넣고 끊여 먹는것을 즐긴다.맛은 싱겁고 구린 냄새에 외국인들은 먹기가 여간 고역스럽다.그러나 몽고인들은 너무나 맛있게 먹는다.물론 구운 양고기도 먹는다.몽고인들은 알가르란 연료를 사용한다.나무가 적은 초원에서 생활해온 유목민족에게 중요한 연료는 초식 동물의 대변이다.알가르란 소의 대변을 말린 것이다.연료가 되는소의 대변 뿐만이 아니라 양과 말의 대변도 사용한다.양의 대변을 홀고르라고 부르며 말의 대변은 호모르라고 한디.가장 좋은 연료는 소의 대변이다.이러한 동물의 대변은 바싹 말리면 코에 가까이 대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몽고인 주거지 겔에서 난로에다 알가르를 넣고 태웠다.타고 있는 알가르를 꺼낸 다음 불길을 끄자 연기가 세차게 피어오른다.초원에서 서식하는 곤충의 습격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다.알가르의 연기는 순식간에 곤충을 몰아냈다.알가르의 타는 모습은 눈을 자극하지 않고 냄새는 향기로웠으며 저녁의 단란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이는 초원에 사는 몽고인의 집을 방문한 사람이 겪은 것을 전한 모습이다.초원에 사는 몽고인의 집을 겔이라고 한다.가축의 이동에 따라 생활근거지를 옮기는 유목민에게는 해체.운반.조립이 간단한 겔이 대단히 편리한 집이다.이 겔은 지름이 4미터에서 5미터정도의 둥근 모양으로 땅에다 세우며 버드나무 등으로 골격을 만든 다음 펠트를 씌운다.천장은 연기가 나가고 하늘이 보이도록 훤하게 뚫는다.비가오면  밑에서 끈을 잡아당겨 덥개로 천장을 덮는다.밤에 겔 안에서 잠을 잘 때면 하늘에 떠 있는 별이 보인다.알란고바는 남편 두분메르겐이 죽고 나서 겔의 천장을 통해 내비치는 빛의 정신을 잉태하여 아들 세명을 낳았다.그가운데 막내 보둔차르가 징키스칸의 조상이 되었다.물론 이 이야기는 징기스칸에 대한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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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툰드라 회색지대

 

 

 

 

 

 

 

북극해를 둘러싸고 있는 광대한 평원과 습지가 펼쳐있다.바로 툰드라지대이다.땅에서 수십 센티미터  아래는 꽁꽁 얼어 있다.그 두께는 수백 미터에 이른다.툰드라지대는 삼림지대와 얼음의 세계를 나누는 지역이다.이곳은 지구 육지면적의 10분의 1을 차지한다.짧은 여름이 오면 툰드라의 호수와 작은 강에는 남쪽에서 물새가 날아온다.오리.기러기.뇌조도 날아오고 무엇이든 먹는 회색곰과 카리부를 노리는 이리들이 서성거린다.900여종에 이르는 식물이 자라고 있지만 길고 곧은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버드나무.오리나무 등 몇 종류의 나무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겨우 사람 키만한 높이로 자란다.나무들이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습지와 자갈지대 사이에 순록이끼가 빽빽이 자라고 있는 지대가 있다.이곳은 카리부의 식량창고이며 북방권의 목장이다.식물은 짧은 여름 동안 꽃을 활짝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겨울이 되면 땅은 얼고 많은 생명은 자취를 감춘다.이곳은 에스키모가 말하는 " 누나카 " 즉. "우리들의 땅 " 이다.북극은 육지.바다 그리고 하늘에도 동물이 풍부한 곳이다.카리부의 무리가 지나가는 데만  며칠씩 걸린다.석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카리부를 쫓아 북으로 북으로 거슬러 올라갔을 것이다.알류산열도에 알류트인이 살고 있었다.그들은 가죽으로 만든 카약 모양의 배를 만들고 회전식의 작살을 사용하여 바다표범 등 해수수렵을 하며 바다표범의 기름으로 램프에 불을 켜고 뼈.뿔.상아로 많은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이들은 알래스카에 사는 에스키모와 매우 비슷하고 언어도 비슷하다.에스키모언어와 알류트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시아대륙에서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라고 추정되고 있다.아메리카대륙에는 원래 사람이 살지 않았다.아시아대륙과 아메리카대륙은 현재는 베링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지금부터  약 4만 년 전에는 빙하기로서 지금보다 해면이 140미터나 낮았다.따라서 아시아대륙과 아메리카대륙은 서로 육지로 이어져 있었다.사람들은 동물을따라 아시아대륙에서 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건 것으로 보고 있다.아메리카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주민은 아메리카 인디언이다.이들이 바로 아시아대륙에서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간 것이다.그리고 그들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퍼졌다.수천 년에 걸쳐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가장 늦게 건너간 사람은 에스키모언어와 알류트언어를 사용한 사람들로 보고 있다.알래스카  에스키모 문화는 현재 북극의 유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8500년 전의 것으로 발견된 석기가 있다.이 석기종류 중에는 시베리아 바이칼호 주변에서 발견된 15000년 전에서 12000년 경 석기와 비슷한 것도 있다.이는 시베리아의 환경속에서 석기를 만들어 수렵문화를 형성한 사람들이 알래스카까지 건너와 에스키모 문화를 만들어 갔을 것이다.알래스카의 자연속에서 해상수렵의 기술은 더욱 발전하여 캐나다에서 그린랜드로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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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얼음의 세계

 

 

 

 

 

 

 

 

에스키모는 스스로 "이누크" 혹은 "유크"라고 부른다.이것은 "인간 "이란 의미이다.동양인들이 주식으로 쌀을 먹는 것과 같이 에스키모들은 카리부와 바다표범을 날것으로 먹는다.그런 에스키모를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그러면 사람들이 전골을 먹는것은 어떠한가?소를 잡고 부위마다 자르고 고르는 작업을 한다.생선회는 어떠한가.싱싱할 수록 맛있다고 우리는 보통으로 생각하지 않는가.에스키모들은 그러한 음식문화가 일상으로 대대 손손 자리잡은 것이다.그 곳에서는 고기를 많이 먹어두지 않으면 추워서 견디지 못한다.또한 날고기는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다.음식을 익혀 먹는 곳에서는 야채와 과일을 먹지 않으면 비타민 C가 부족해서 빈혈을 일으키고 몸이 쇠약해지며 이빨과 피부에서 피가나오는 괴혈병에 걸린다." 가능한 피가 묻지 않은 부분을 골라 칼로 저민다.잘라낸 고기의 감촉은 미끈미끈한 뱀장어와 같다.지독한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날고기가 혀에 닿자마자 위는 거부반응을 일으킨다.고기 조각이  아직 입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는 경련을 일으켜 위액이 꺼꾸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산 미꾸라지를 먹은 느낌이다.날고기를 그냥 통채로 삼킨 순간 고기 조각은 위에서부터 꺼꾸로 목구명까지 올라왔다.몇 번이나 되풀이한 후에야 가까스로 고기 조각을 위 속으로 집어 넣을 수 있었다." 이는 한 탐험가가 그린랜드에 있는 에스키모 마을에서 처음으로 날고기를 먹었을 때의 기분을 표현한 것이다.에스키모들은 카리부.바다표범.오리.뇌조.힌곰.바다코끼리.토끼.연어 등을 먹는다.이 중에서 특히 연어만은 구워서 먹는다.에스키모들의 교통수단은  개가 끄는 썰매이다.에스키모들은 개를 채찍으로 휘들러 훈련시킨다.개는 짐을 끄는 동물로 이용해왔고 사냥을 할 때에는 동물을 막다른 곳까지 몰아넣는 등 여러 역할을 수행했다.에스키모들은 개를 자식처럼 보살피고 소중하게 여기지만 늘 엄격하게 다룬다.게으름을 피우는 개는 가차없이 체벌을 가한다.에스키모사회에서는 그들만의 생활방식이 있다.우리들의 기준으로 잔인하다.야만적이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그들은 오래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다.지금은  모터가 달린 스노우모빌도  썰매를 대신하고 있다.개가 끄는 썰매가 하루에 50킬로미터에서 100킬로미터 정도 달릴 수 있지만 스노우모빌은 하루에 300킬로미터에서 500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다.그러나 영하 50도나 되는 땅위에서 만약에 엔진이 작동되지 않으면 스노우모빌을 타지 않는다.그래서 개를 여전히 훈련시키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북극에서는 집 밖에서 10분도 서 있을 수 없다.따라서 북극에 사는 모든 연인들은 사랑을 은밀히 나눌 수가 없고 부모님의 눈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특히 봄에 속삭이는 사랑은 더더욱 재미가 없다.밤은 대낮처럼 밝다.툰드라는 손바닥을 펼친 것처럼 평평하다.모든 물체는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잘보인다.사랑하는 사람들끼리만 있을 장소가 전혀 없다.북극은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통하지 않는 점이 너무 많다.알래스카에서 코체부에 이르는 1만 2천킬로미터를 개가 끄는 썰매로 여행하면서 탐험하는 경우에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대변을 처리하는 일이다.보는 사람이 없지만 재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엉덩이가 그대로 얼어버리게 된다.에스키모는 카리부의 가죽으로 털옷을 만들어 입는다.털을 바깥으로 한 것이 아노가제이다.에스키모는 옷을 알몸 위에 그대로 입는다.속옷은 입지 않는다.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가죽과 살갗 사이에 공기층을 만드는 것이다.이렇게 입으면 따뜻하면서도 활동적이다.바지와 장갑도 카리부의 가죽으로 만든다.가죽신은 카리부와 바다표범의 가죽으로 만든다.이 이상 완벽한 방한도구는 없다.기온이 영하 50도가 되더라도 끄떡없이 지낼 수 있다.에스키모가 만든 것  중에 유명한 것이 나무로 만든 선글라스이다.눈으로 뒤덮인 곳에서는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눈에 선글라스를 낀다.나무로만든 안경 중앙에  가는 홈을 뚫는다.이것이 눈에 비치는 광선의 양을 적게 하는 것이다.에스키모에게 눈으로 된 얼음 그 자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그 얼음이 어떠한 상태인가를 정확하고 확실하게 알아본 다음 얼음의 용도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얼음으로 집을 만드는데 필요한 얼음은 두께가 똑같고 지나치게 부드럽지도 않고 단단하지도 않은 얼음이 좋다.얼음으로 된 집은 얼음톱이나 얼음칼로 자른 세로 40센티미터에서 50센티미터 가로 60센티미터에서 90센티미터  두께가 12센티미터에서 15센티미터 정도의 얼음으로 쌓아간다. 에스키모가 눈(雪)을 나타내는 단어가 30가지나 된다고 한다.이루구자크는 집을 만들 때 쓰는 눈.푸가크는 결이 곱지 않은 눈으로 이것 밖에 없으면 차폐물도 만들지 못한다.마사크는 봄에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의 부드러운 눈.아케로카크는 꽤 단단하지만 집을 만들정도로 단단하지 않은 눈.가니크는 지금 내리는 눈.아푸트는 땅위에 쌓인 눈.마우야는 매우 부드러운 눈.이렇듯 에스키모의 생활과 눈의 관계는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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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대륙의 최초문명   

 

 

 

 

 

 

 

 

 

 

아프리카는 고대부터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태동하였다.아프리카 대륙의 선사시대는 기원전 5000년 경에서 기원전 1500년 경 사이로 이 기간 동안 아프리카인들은 다양한 문화 기술을 발전시켰다.그 중에서도 나일 강 주변에 위치한 이집트 고대 문명은 농업을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피라미드를 비롯한 건축물과 고대신화 및 예술을 창출했다.이는 선사시대 아프리카 문명을 대표하는 중요한 문화로 평가 받고 있다. 기원전 450년 이집트를 걸어서 답사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년)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일강은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서 장장 6650㎞를 굽이치며 흘러간다. 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의 지중해로 흘러가는 나일강은 남부의 누비아와 북부의 이집트를 잇는 젖줄 같은 강물이다. 헤로도토스의 지적대로 나일강이 없었다면 이집트 문명은 생겨날 수 없었다.나일강은 해마다 정기적으로 범람하여 양분이 풍부한 검은 표토(表土, topsoil)를 강둑 양쪽에 쏟아놓았다. 덕분에 강변으로는 넓게 펼쳐진 천연 농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따로 비료를 주지 않아도 다른 어떤 곳보다 더 많은 곡물을 산출할 수 있는 그야말로 천혜의 옥토였다. 고운 흙이 가득히 쌓인 그 넓은 땅 위에 곡물의 씨앗을 뿌리면 수백 배 많은 곡식을 어김없이 산출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나일강둑 양변에 몰려들어 마을을 이루고서 수천 년을 풍족하게 살아갔다.국가 출현 훨씬 전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미 자생적인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고 강변의 개활지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장구한 세월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얘기다. 고대 이집트 국가는 이미 존재하는 강변 마을들을 차례로 지방 행정단위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문제는 나일강만으로는 이집트 문명의 창조력과 고유성을 제대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융성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집트의 위대한 임금들 곧 파라오(pharaoh)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고대 이집트인들이 나일강이 베푸는 자연적 혜택에 자족했다면 피라미드를 건축하는 높은 수준의 고대 문명을 형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강을 이용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경제적 풍요와 부의 집적을 이뤄냈다. 바로 그 점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집트의 절대군주 파라오의 적극적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특히 주목하는 인물들로는 이집트 제1왕조의 제1대 파라오 나르메르(Narmer) 와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이집트 제4왕조의 제1대 파라오 스네프루(Sneferu.재위 기원전 2613~2589년). 최초의 여성 군주 하트셉수트(Hatshepsut.재위.기원전 1479~1458년). 태양신 아톤의 일신교 체제를 확립한 제18왕조의 파라오 아크나톤(Akhenaten.재위 기원전 1352~1335년).이집트 신왕국 19왕조의 제3대 파라오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람세스(Ramses, 재위 기원전 1279~1213년) 등을 꼽을 수 있다.그중에서도 특히 이집트 북부 나일강 하류에서 일어나서 남부의 나일강 상류 지역을 정치적으로 통일한 나르메르의 업적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인류사 현전 최고(最古) 문서는 기원전 3200년 혹은 3150년경 최초로 이집트를 통일한 나르메르의 영웅적 위업이 기록된 나르메르 팔레트(Narmer Palette)이다.

 

 

 

 

 

 

 

 

 

 

 

 

 

 

 

 

 

서기1897년에서 서기1898년 고대 이집트 남부의 종교적 중심지 네켄(Nekhen)에서 영국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이 팔레트는 5000년간 땅속에서 완벽하게 보존되었다. 실트암(siltstone)을 잘 갈아서 만든 기다란 반쪽 타원형의 팔레트로 크기는 세로 63㎝에 가로 42㎝ 정도이다. 양면에 부조된 여러 상징적인 그림문자들은 고대 이집트 최초 통일 왕조가 세워진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앞면 중앙에는 긴 모자를 쓴 큰 사내가 곤봉을 잡은 오른팔을 쭉 위로 뻗고 정을 잡은 왼손은 주저앉은 사내의 머리를 잡고서 힘차게 내려쳐서 깨부수려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곤봉으로 적의 머리를 깨부수는 바로 이 이미지는 이후 3000년에 걸쳐서 고대 이집트에서 정복의 의미로 계속 사용되었다.이집트학의 대가들은 바로 이 그림 속 사내가 나르메르라고 추정한다. 그 근거는 우뚝 선 사내의 머리 위에 새겨진 직사각형 속의 상형문자이다. 궁전을 상징하는 듯한 그 직사각형 안에는 물고기와 끌이 새겨져 있는데 이집트어로 물고기는 나르(nar)이며 끌은 메르(mer)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이집트 문자 역시 뜻과 소리가 뒤섞여 사용됐다. 이 문서는 결국 나르메르의 통일 위업을 기리기 위해 국가 기관에서 제작한 일종의 기념 문서라 할 수 있다.나르메르의 통일왕조 건립은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하게 한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강력한 정치권력이 형성되기 위해선 경제적 풍요가 필수적이다. 나일강 유역에선 일찍이 풍족한 곡물이 생산됐다. 어느 사회에서나 누구든 남아도는 곡물을 집적하게 되면 대규모 인원을 상시 고용할 수 있게 된다. 일단 그 인원은 경제활동 인구에서 제외되지만 그들의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활용하면 대규모의 토목 사업을 벌일 수도 있고 원거리 정복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규모 인력을 조직하게 되면 바로 거기서 정치권력이 생겨난다. 정치권력이 고도로 집중되면 군사적 정벌과 병합을 통한 통일제국의 건립이 가능해진다. 통일왕조의 수립은 경제력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대규모 수리 사업으로 나일강의 물줄기로 내륙까지 연결해 더 넓은 농지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나일강 중류에서 기원전 1000년 경 쿠시 왕국을 건설한 누비아사람들도 이집트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쿠시왕국은 오늘날 수단에 위치한 강력하고 독창적인 문화를 발전시켜나가면서 아프리카 내륙의 중요한 중심지로 자리잡았다.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양식에 영향을 받았지만 독특하고 작은 규모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오늘날 메로 지역에 남아 있어 쿠시 왕국의 건축적 유산을 대표하고 있다.수도 메로는 철기 생산과 상업활동 중심지로 크게 번성하였다.뛰어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전역과 교류하며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쿠시 왕국은 지중해 세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역로로 금.상아.철과 같은 귀중힌 자원을 교역하였다.한편 동부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고원에서는 기원전 1000년 경부터 셈계 민족이 에티오피아 고원의 북부에 정주지를 형성하며 악숨 제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서기1세기에 악숨 제국은 고원을 넘어 소말리아와 아라비아 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동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있는 왕국이 되었다.

 

 

 

 

 

 

 

 

 

 

 

 

 

 

 

 

서기 3세기에서 4세기에는 화폐를 제조하고 기독교를 수용하며 종교 문화를 꽃피웠다. 나일강 중류의 쿠시 왕국 이 쇠퇴하던 시기 악숨 제국의 영향력은 로마제국과 인도까지 닿고 있었다.10세기까지 지속되며 정치적 .경제적.종교적 중심지로의 역할을 하였다.거대한 석조 비석과 오벨리스크 등 독창적인 건축물들은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특히 오벨리스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형 석조기념물 중 하나이다. 아프리카 서부에서는 가나. 말리. 송가이 등이 차례로 등장하며 활발한 무역 활동으로 이슬람과 서부 아프리카 토착 문화를 꽃피웠다. 가나 왕국은 기원전후로 이 지역에 살았던 민족이 이룩한 문명이자 토착 종교를 지켜낸 제국으로 약 500년간 무역 활동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우다가 10세기경에 쇠퇴하였다. 말리 왕국은 13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이 지역을 다시 통합하면서 도팀북투.젠네등을 중심으로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다.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무역로의 중심지로 번성하면서 당시 아프리카 대룩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국가로 등장했다.말리 제국의 황제 중에 만사무사는 14세기에 메카로 순례를 떠나며 길을 따라 금을 대량으로 나눠주는 행위로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겼다.15세기 이후 말리 왕국 내 작은 민족국가였다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송가이는 동쪽 나이저강 유역으로 영토를 넓히며 이슬람 문화를 확산시키고 교육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아프리카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차드 분지에서는 카넴보르누 왕국이 7세기 이후 2천 년간 무역 활동을 하며 이슬람 왕조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10세기 이후 나이지리아 중부와 북부 나이저강 유역에서는 하우사 왕국이 세력을 키우며 여러 왕국을 연합하기도 하였다. 북부 아프리카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유럽과 교류하면서도 아랍 문화를 발달시켰다. 모로코.알제리. 튀니지.리비아 등 북서부 지역의 국가들을 묶어 마그레브라 부르는데 이는 ‘해가 지는 지역’이란 뜻의 아랍어다. 이곳의 역사는 주로 아랍권 무슬림과 유럽권 기독교인들과 교류하며 쓰여졌다.그 중 유명한 사례가 카르타고이다.기원전 1000년 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연안에 카르타고 도시 국가를 세웠고 유럽 사회와 교류를 지속했다.카르타고는 현재의 북아프리카 튀니지아에 위치했던 고대의 강력한 도시 국가였다.지중해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문명으로서 페니키아의 식민지로 시작되어 발전했으며 이후 독립적인 정치와 경제 체제를 구축하며 독자적인 문명으로 성장했다.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지중해의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했다.지중해 해상 무역을 장악하여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발전했다.뛰어난 항해술과 선박제작기술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지중해 연안을 연결하는 교역망을 통해 국제적인 상업중심지로 자리잡았다.남부아프리카에서는 짐바브웨라는 고대 도시국가가 당시의 지역의 문명과 위엄을 갖고 독창적인 석조 건축물과 뛰어난 기술력으로 번성하였다.이 도시는 오늘날 짐바브웨 공화국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도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거대한 석벽과 탑으로 돌을 접착제 없이 쌓아 올린 정교한 건축술은 이 문명의 기술적 역량과 창의성을 입증하고 있다.특히 거대한 언덕 요새와 대규모 원형 구조물은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정치와 종교.사회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또한 이러한 건축물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 오늘날에도 많은 찬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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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대륙 초기 문명 

 

 

 

 

 

 

 

 

 

아메리카라는 이름은 아메리고 베수푸치라는 이탈리아인의 이름에서 따왔다.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신대륙을 두 차례 항해했는데 그는 이 대륙을 신세계라고 불렀다.그의 이름을 딴 신대륙의 이름이 처음 지도에 등장한 것은 1507년의 일로 독일 출신의 지도 제작자 Waldseemuller가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칭하였다. 후에 지도를 만든 화사는 신대륙의 이름을 콜럼버스의 이름을 따 짓기 위하여 한 때 이름을 삭제하기도 하였으나 이미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후의 일인지라 번복을 하지 못했고 이렇게 신대륙의 이름은 아메리카가 되었다.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은 기원전 3만년 경에 당시 육지로 이어져 있던 베링 해협을 건너 이동해 간 아시아계 수렵인들이었다.그들은 메머드 등 큰 짐승을 쫓아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 놓았는데 기원전 약 1만년 경에는 대륙의 남단에 아르렀다.기원전 3000년 경 멕시코 중동부 지방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옥수수 재배를 시작하기 시작하였다.옥수수는 수확량이 많고 영양가에서도 보리나 쌀에 뒤지지 않는데다가 보존하기도 쉽다.온대.아열대.열대 등 여러 기후 조건에 쉽게 적응하는 곡식이다.수 천년에 걸쳐 품종 개량이 이루어져 오늘날 같은 품종으로 발달하였다.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은 바로 옥수수 재배의 발달을 통해서 성립되고 발전한 것이다.멕시코와 증앙 아메리카에 처음 문명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올메크인이었다.그들은 피라미드를 세우고 별을 관측하고 시간을 측정하였으며 그림문자 글리프스를 가지고 있었다.기원전 2000년경 에 시작된것으로 짐작되는 마야 문명의 중심지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였다.이 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 중심에 신앙의 중심지로 피라미드를 세웠다.마야인들은 주로 옥수수 농사에 종사한 농민들이었으나 카리브 해나 멕시코 만 연안 사람들은 소금.건어물.면화.꿀.구리.금세공품.진주.새 깃을 박아 넣은 의복 등을 교역하는 장인들의 활동이 활발했다.0과 20을 기본으로 하는 계산법이 사용되었으며 1년을 365일로 계산하는 천문 역법도 발달하였다.마야문명은 서기 300년부터 900년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다가 쇠퇴하였다. 이후 잉카문명은 서기 12세기경(1200년경 에서 1530년 경까지)에 지금의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에서 기원했다. 이 문명은 수세기 동안 페루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차빈. 모체. 나스카.티아우아나코 문명들을 정복해서 정치. 경제.문화.언어 및 종교적인 통일을 이루었다. 이들이 건설한 잉카제국은 콜롬비아에서 칠레의 마울레 강까지 그리고 태평양에서 안데스의 동부 계곡지대까지 안데스 전역에 걸쳐 있었다.이 거대한 제국 내에는 많은 부족이 저마다의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키며 살고 있었다. 이렇게 독자성이 강한 여러 민족을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 모아서 다스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잉카인은 다른 부족을 점령했을 때 제일 먼저 점령지에 행정관을 배치해 통치구조를 잉카식으로 고치고 그들에게 잉카의 태양신을 최고신으로 모시게 했다. 또한 지도자들에게 잉카의 언어인 케추아어를 가르쳐서 이들을 잉카제국의 통치권 속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그 지역의 다음 왕이 될 젊은 왕자를 수도 쿠스코로 데려와서 잉카식 교육을 시켰다. 후계자가 쿠스코에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에는 반란을 꾀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에 따른 정책이었다. 반란의 낌새가 있을 때에는 하룻밤 사이에 모든 주민을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사용하여 반란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서 잉카제국 내에서는 반란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거대한 잉카제국은 '케추아어'라는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었다. 또하나의 문명은 아스테카였다. 아스테카 문명은 서기 1250년경부터 1521년까지 멕시코 분지(현재의 멕시코시티)에서 꽃을 피웠다. 이 문명을 건설한 원주민은 12세기 초반에 멕시코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나우아틀어를 사용했다. 이 종족을 가리켜 흔히 아스테카인이라고 부른다.아스테카인이 살던 테노츠티틀란은 호수 가운데 있는 작은 섬이었다. 이 섬의 면적은 확실하지 않지만 최소 12제곱키로미터에서 최대 20제곱킬로미터로 추정한다.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여의도 면적이 4.5제곱킬로미터이므로 그것보다 3배 내지 4배 정도 더 큰 섬이었다. 인구는 15만에서 20만 정도였다.서구인 최초로 이곳에 도착한 에스파냐 정복자 코르테스는 서기 1520년 에스파냐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위대한 도시 테노츠타를란은 짠물 호수 가운데 있으며 어느 뱡향에서든 물에서 이 도시까지의 거리는 2레구아(약 9.6킬로미터) 입니다.네 개의 둑길은 모두 인력으로 만들었는데 둑길의 폭은 기병이 사용하는 창 2개의 길이쯤 됩니다.세비야나 코르도바만큼 큰 도시 입니다" 이 호수는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강물을 막아서 생겨난 것으로 겉보기에는 하나의 호수 같지만 사실은 5개의 호수가 연결되어 있었다. 아스테카인이 살던 섬은 중앙에 있는 테스코코 호수에 있었다. 이 호수를 비롯하여 북쪽의 두 호수는 짠물이고 남쪽의 두 호수는 민물이었다. 짠물은 농업용수나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했다. 게다가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에는 홍수를 겪기도 했다.아스테카와 관련한 글을 보면 종종 메소아메리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 메소아메리카는 특정 문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여러 문명이 흥성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종의 문명권인 셈이다.선사시대부터 아메리카 대륙의 곳곳에서는 여러 문명이 끊임없이 발흥했다가 멸망했다. 그런데 중미 지역 여기저기서 발흥한 문명은 차이점 못지않게 공통점이 많았다. 이를테면 옥수수를 재배하고 피라미드 외부에 계단을 내고 250일 주기 달력과 365일 주기 달력을 사용하였다. 이런 공통점을 보이는 문명이 발흥한 지역을 일컬어 20세기 인류학자 폴 키르히호프는 메소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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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 

 

 

 

 

 

 

 

 

 

 

일반적으로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건국 연도는 기원전 2333년(요임금25년)년 경으로 이는 서거정의 "동국통감"에에 따른 것이다.이는 중국의 요임금 즉위년을 기준으로 본 것이다.요임금은 삼황오제 전설에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이다.단군왕검도 신화적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하느님이신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목적으로 바람.비.구름을 각각 주관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곡식.생명. 형벌 등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 가지를 주관하며 사람들을 다스렸다. 그러던 중에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환웅은 곰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 그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단군이다. 단군 왕검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다.” 이 신화는 당시의 지배자를 신격화하기 위한 것이였다. 이후에도 한반도 부족국가의 건국에는 어김없이 신화가 태동하였다.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 사실은 우리 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말해 준다. 또,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 사실과 홍익 인간의 건국 이념은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기원전 1200년 경에서 1000년 경을 전후하여 요령 지방과 한반도 일대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형동검. 반달 돌칼 등이 만들어졌으며 농업 생산력도 높아졌다.만주에서는 이보다 앞서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처음으로 금속을 사용하였으며 그들이 사용한 토기도 보다 단단해졌다.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동검과 청동 거울이 있다. 동검은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발전하였다. 비파형 동검은 요령 지방과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세형 동검은 한반도의 각 지역에서 고르게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있다. 선돌과 함께 청동기 시대 유적의 특징을 보여 주는 고인돌은 한반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보다 발전된 무덤인 돌널무덤은 만주와 한반도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무덤에서는 비파형 동검을 비롯하여 많은 청동기와 민무늬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군장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정치적 사회는 요령 지방과 한반도의 북부에서 먼저 나타났는데 이들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문화가 앞선 곳이었다. 초기에는 읍락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사회를 이끌어 간 지배자는 자신이 하늘의 아들이라 하면서 정치와 종교를 아울러 지배하였다. 그리고 점차 복잡해져 가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도 만들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나라가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의 단군 왕검은 종교와 정치를 함께 지배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고조선의 흔적이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연나라와 접하기 시작한 기원전 300년 경의 기록이다.서한말 유향이 정리한 "전국책"에서 유세객 소진이 연나라 주변의 국가들을 열거하는데 여기서 고조선이 등장한다.이 무렵 연나라 쾌왕 때의 "차지의 난"의 여파로 제나라에 크게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는데 이를 틈타 조선도 대부 등의 관직을 두고 왕을 칭하는 등 연나라와 맞섰다.특히 왕이라는 칭호는 본래 주나라 천자의 칭호로 전국시대 당시에 참칭하는 왕조가 늘어났기는 했으나 여전히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는 칭호였다는 점에서 당시의 고조선의 국력이 커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이 당시 고조선은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600년 경부터 기원전 500년 경에 이르는 기간동안에 랴오닝성과 지린성 일부 지역의 부족국가들을 복속시키며 통일 국가를 넓혀 가고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영역까지 복속시키며 기원전 323년 칭왕을 할 무렵에는 랴오닝성 전역 및 지린성 일부지역과 평안도 .황해도 일대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와 국력을 지니게 돠었다.그러나 연나라와 전쟁에서 패한후 조선의 서방 쪽 패수의 땅 2,000여 리를 잃었다.조선이 연나라에게 패퇴한 뒤 반 세기 정도가 지난 뒤에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그 크기만으로도 압박이었을 중국의 통일 국가는 요동에 무언의 군사적 압력을 가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은 이에 스스로 복속하는 길을 택했다.두 나라 사이에는 안전이 보장된 근거인 공지(空地) 패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진나라에서는 오히려 부자 세습이 이루어지는 등 혼란한 시기가 지속되자 조선이 힘을 비축해 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진한교체기로 중원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조선이 증흥에성공했다. 이 시기 고조선은 공백이 생긴 서북쪽의 패수까지 다시 영토를 회복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연 · 제 등의 유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워나가며 위상을 높여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 고조 시기에 연왕 노관의 반란을 틈타 조선에 망명해온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중국 유망민 세력을 결집했다. 위만은 연의 고조선 침공 때 복속된 고조선계의 연나라 사람으로 보고 있다.위만이 유망민 세력을 결집한 데는 조선이 대륙의 혼란기에 획득한 옛 공지(空地)에 위만을 책봉하고 중국 유망민을 배치하여 결과적으로 신흥 세력의 결집이 쉬웠던 것이 작용했던 듯하다. 위만은 한나라가 쳐들어온다는 거짓말로 준왕을 속인 후 정변을 일으켜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수도를 왕검성으로 국호를 위만조선으로 정했다. 위만은 고조선 중심 계층의 입장에서는 외래인이었기에 위만조선 시기 고조선이라는 국가의 운영은 중국계 유이민을 포함한 위만 세력과 토착 세력인 상(相) 세력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위만조선 정권 내부에 문제가 있을 때는 상(相) 세력이 자신들의 산하 세력을 온존하면서 위만조선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때문에 위만조선 단계까지도 고조선에서는 군현제와 같은 직접 통치에 입각해 제어한 지역은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다. 위만조선은 그것을 대외무역으로부터 찾았다.위만은 즉위 직후 전한과 외신(外臣)의 약조(約)를 맺고 중국으로부터 철제 농기구 및 무기. 가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적인 유물은 나오지 않아 철기가 아주 널리 쓰이거나 직접 제작되지는 못한 듯하다. 당시 한나라의 집권자였던 여후시대는 흉노족에게 시달려 외부 확장을 자제하는 분위기였으므로 위만조선은 안전을 보장받고 우호관계를 맺었다.이러한 한나라 방면의 안정과 선진문화의 전수를 바탕으로 위만조선은 진번.임둔까지 주변 소국들을 정복했고 손자 대인 우거왕 때에는 진한 마한 변한 등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이 한나라에 입조하는 것을 막고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동북아의 패자로 떠오른 한 무제 유철이 제위에 오르면서 한나라의 주변국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강요되기 시작했다. 흉노 제국에 대한 대규모 원정으로 시작하여 남월이 원정 대상이 되었고 조선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한무제가 조선 원정을 밀어붙인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이 흉노를 견제한다는 명분에서였다.한나라와의 전쟁의 계기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 대해 불만을 제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섭하가 교섭에 실패하자 조선의 비왕(裨王)을 살해하고 도망간 사건이었다. 그런데 한나라는 처벌은 커녕 도리어 섭하를 요동 도위에 부임시켜 공을 치하했다. 이는 조선과의 전쟁을 유인하는 미끼 작전이었다.고조선이 군사를 파견해 섭하를 살해하면서 전한과 고조선 사이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수군과 육군의 양동 작전이 이루어졌으나 수군이 지지부진했고 고조선은 장기 항전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지연되자 한군의 장군 측에서 평화 관계를 제안해왔으나 한나라가 고조선의 태자에게 호위 무장 없이 국경선인 패수를 넘으라고 요구한 것을 고조선이 거부하여 전쟁이 다시 시작하였다.이후 고조선은 1년간의 항전에 나섰으나 장기화된 전쟁으로 조선의 상(相) 세력이 이반하여 우거왕이 시해되었다. 이후 성기에 의해 항전 세력이 수습되었으나 끝내 한군에 의해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은 멸망했다.고조선의 멸망 이후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설치되었다.이후에 산하에 존재했을 읍락국가들이 대두되면서 한국사는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조선 후기부터 기원전 108년 멸망기까지 많은 고조선 유이민이 남하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쪽의 삼한에서는 전기부터 고조선계 예맥인들이 다수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특히  "삼국사기" 에는 고조선 유민들이 신라 건국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고조선은 존재하던 중에 세 차례의 큰 위기가 있었는데 일단 전국 시대 연나라의 진격 와중에 연나라를 피해 한반도 남부로 피했던 부류들은 알려진 것만 따지자면 오늘날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 일대 .전라도 동부일대.경주 일대다.위만이 준왕을 몰아냈을 때에는 전북 서부 일대로 주로 갔고  물론 경주에도 갔다.당연히 이 지역들 말고 다른 곳에 정착했을 개연성은 높다. 한사군 설치 당시에는 오늘날 전남 남서부 일대와 경주로 갔다. 한사군 설치 이후에도 꾸준히 낙랑.대방의 조선 유민들은 중원측 지배자와 의견이 맞지 않거나 다른 기회가 포착되면 한반도 곳곳으로 남하했고 그런 흐름에서 건국된 게 바로 목지국.사로국.금관가야 등이다.한편으로는 남하하지 않은 고조선 유이민들은 부여로 흡수된 사실이 없다. 고조선은 최전성기에도 부여와 국경이 맞닿았던 적은 없으며 남하하지 않은 부류는 그냥 전국시대 연나라.서진의 지배 아래 살았다 .연나라가 고조선을 요동에서 밀어낼 때 미처 정복하지 못했던 요동 동부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고조선 유민들은 훗날 남하해오는 부여인들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건국하거나 옥저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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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인류의 이동

 

 

 

 

 

 

 

 

 

현대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13만년 경에서 11만년 경에 아프리카 밖으로 첫발을 내디뎠고 일부는 북쪽으로 일부는 동쪽으로 움직였다.동쪽으로 이동한 그들은 낮은 해수면 덕에 아시아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순다랜드(현 인도차이나반도)에 6만년 경에서 4만 5000년 경에 도착했다.그리고 순다랜드 북부에 도착한 호모 사피엔스 중 일부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시베리아.중국 북부.만주 등에 정착했다. 이들 중 만주의 수렵채집인 일부가 3만년 경에서 2만 5000년 경에 한(韓)반도에 들어왔다. 초기 한(韓)반도 정착민들을 움직인 것은 차가워진 기후였다. 2만 9000년 경부터 지구의 기후는 점차 한랭해졌고 2만 4000년 경에서 1만 9000년 경 사이에 추위는 절정에 달했다.북중국의 수렵채집인은 이 시기 따뜻한 해안을 찾아 대거 남쪽으로 이동했고 일부가 연해주와 한반도로 들어와 구석기 문화를 구성하고 훗날 한(韓)민족의 바탕이 된 것이다.이들은 한반도(韓半島)와 그 북쪽에 연한 만주(滿洲) 일부에 살고 있는 종족으로 공통된 한국어를 사용하며 공동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민족으로서 황색인종(黃色人種)에 속하며 우랄-알타이어족인 원시 퉁구스의 한 갈래로 고대 중국에서는 동이(東夷)라고 불렀던 일족이다. 한(韓)민족이 언제부터 만주와 한반도에 살았는지 그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1만 년을 전후한 구석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었음을 그들이 남긴 유적 ·유물에 의하여 알 수 있다. 한(韓)민족의 조상들은 일찍부터 인류의 발상지라고 일컬어지는 중앙아시아 지방으로부터 구석기시대를 전후하여 몽골과 만주지방에까지 이동해왔다고 여겨진다.남해안지방에는 해류관계로 부분적으로 남방계통의 민족이 흘러들어와 혼합되었고 황해(黃海)를 건너 한족(漢族) 계통도 들어왔을 것으로 본다.중국의 "시경" 이나 "논어" 등에는 맥(貊:)이 불함산(不咸山:長白山)을 중심으로 백의 민족으로서 古朝鮮에 산다고 하였고 "사기(史記"를 비롯한 후대의 사서(史書)에는 이 종족을 예맥족이라고 하였는데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경에  한반도 최초의 고대국가를 형성하였다.예맥족은 연구 결과 오늘의 한(韓)민족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예맥족은 고대 아시아 민족인 퉁구스족에 속하며 만몽계통 또는 터키계통과 공통된 먼 공동조상에서 갈라진 일족이다. 예맥족은 곰(熊)을 신성시하여 수호신 ·조상신으로 숭배하던 토템족으로 이러한 사상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예맥족은 신석기시대의 초 ·중기부터 대륙지방에서 동쪽으로 진출하여 만주족의 조상인 숙신족(肅愼族)을 만주의 동쪽으로 몰아내면서 열하(熱河) 방면에서 한반도의 구릉지대와 헤이룽강[黑龍江] 유역을 생활무대로 하여 정착하면서 원시적인 생활을 해왔다. 원시사회의 토기를 보면 이들은 만주와 시베리아로 연결되는 북방 아시아계통의 요소를 지닌 빗살무늬토기 계통과.화북과 만주 ·몽골계의 요소가 깃든 민무늬후육토기[無文厚肉土器] 계통과 화북계인 주도마연토기(朱塗磨硏土器) 계통의 세 갈래 길을 택하여 이주해왔다.이들은 그 뒤 만주 북쪽과 동쪽 지방에서 부여(夫餘)를 건설하고 한반도 북부에 고구려 ·옥저(沃沮) ·예(濊) 등의 고대 부족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와 전후하여 한 갈래의 부족은 일찍이 남하하여 반도 남부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오랫동안 한강이남에 살면서 별로 북방의 종족들과 접촉이 없는 가운데 대소의 씨족적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마한(馬韓)·진한(辰韓) ·변한(弁韓)의 3한이 그것이었으며 이들은 총수 70여 개의 부락국가를 이루고 원시생활을 해왔다.이들은 처음부터 마한 목지국(目支國)의 진왕(辰王)을 맹주로 하여 부속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막연하나마 통일된 민족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저4세기 경 고조선과 진국(마한.변한.잔한)

 

 

 

 

 

 

 

 

이들 중에서 4세기경에는 고대 국가인 백제 ·신라가 형성되어 북쪽의 부여계통인 고구려와 남방의 3한을 중심으로 한 한민족 계통의 신라민족으로 크게 분리되었다. 어느 민족이나 처음에는 한 종족이 여러 곳에 씨족사회를 이루고 살다가 차츰 부족국가를 이루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민족의 통일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한민족은 이와 같은 경로를 거쳐 남과 북에 부족국가를 이룬 삼국시대를 거쳐서 7세기 중기에 이르러 민족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백제만을 완전히 통합시켰을 뿐 고구려는 그 일부 즉 남포(南浦)에서 원산만(元山灣)에 이르는 경계선 이남의 영토를 정복한 데 불과하며 신라는 고구려의 남쪽 일부분만을 차지하고 그 유민(遺民)들을 거느리게 된 데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에 통합되지 않은 고구려 민족의 대부분은 한민족과 분리된 만주족이 되었다.지구상 최초의 농경은 1만 2000년 경에서 1만년  경 사이 서남아시아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최종빙기 최성기 2만 4000년 경에서 1만 8000년 경 이후 기후가 점차 올라가는 만빙기 1만 8000년 경에서 1만 1700년 경에 해당한다.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비롯해 인류 역사 대부분의 초기 농경지는 반건조 기후 지역에 있다. 반건조 지역은 강수량이 적어 나무보다는 한해살이풀이 자라기 좋은 초지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한반도의 농경 역사는기원전  50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홀로세 기후 최적기의 절정이었던 기원전 5500년 경에서 5000년 경에 한반도에서 조와 기장 농경이 시작되었고 기후가 양호했던 기원전 3500 년경에서 기원전 2800년 경에 초기 벼농경 문화가 빠르게 성장했다. 이 두 시기에는 온화한 기후 덕에 주변에 자원이 풍부해 수렵채집인의 정주가 가능했다. 한반도의 벼농경은 중국의 양쯔강 중하류 지역에서 기원전 4000년 경에서 기원전 3000년 경에 전파되었다.한반도에 전래된 벼농경은 수도작을 기반으로 하는 송국리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송국리 문화는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문명으로 금강 중하류를 중심으로 3000년 경에 나타났다.기원전 2700년 경에서 기원전 2400년 경에 이르면 충청 이남 대부분 지역의 문화가 송국리 문화로 대체되었다.그러던 송국리 문화는 기원전 2300년 경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추었다. 송국리문화가 사라진 동시에 한반도의 벼농경은 크게 쇠퇴했고 일시적으로 벼농경이 물러나고 수렵채집이 강화되기도 했다.수도작을 통해 인구가 급증했다가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동아시아 전체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다.오랫동안 수수께끼였던 송국리 문화의 쇠퇴 원인을 최근의 고기후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광양 습지의 꽃가루 퇴적물 자료를 분석한 결과 2800년에서 2700년 전 한반도의 기후는 갑자기 나빠졌다.갑작스러운 단기 가뭄이 닥친 것이다. 이때 금강 유역의 송국리 문화인들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으로 남하했고 일부는 바다 건너 제주도에 갔고 또 일부는 일본 규슈 일대에 도착해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 일본의 송국리 문화인들은 높은 생산성을 바탕으로 인구를 점차 늘려갔고 당시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조몬인들을 몰아내거나 동화시켰다.최근 유전자 분석 결과에서도 한국인과 일본인이 분리되는 시점이 대략 기원전 2800년 경으로 나왔다. 당시의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가 송국리 벼농경 문화인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를 일으켰다. 조몬인에서 기원한 아이누족과 류큐인을 제외한 일본인 유전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야요이인들로부터 왔으므로 일본인들에게 한반도의 농경민이 이주한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원전4세기 경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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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와 진시황제

 

 

 

 

 

 

 

 

 

 

 

 

 

주(周)나라(기원전 1024년-256년)는 상나라에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이며 790년간 왕조를 이어갔다.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허강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의 천자로서 중원(中原)을 지배했다.최근 조사에 따르면 주나라 청동기 문화권 영향력은 중원에서 더욱 남쪽 지방인 장쑤(江蘇).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등 장강유역까지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주나라 시기에 넓은 영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봉건제의 개념이 등장하였다.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였고 농지 개척을 진척하였으며 농기구는 목재나 석재로 만들었다.학계는 주나라 시기부터 중국에서 철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771년 견융이 주나라를 침략하여 유왕을 살해하여 제후들이 그의 뒤를 이을 평왕을 옹립했고 곧 이어 현재의 시안부근 호경(鎬京)에서 부도(副都) 낙읍(洛邑)으로 수도를 옮겼다.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 라고 하고 이후를 동주(기원전 770년 ~ 기원전 256년)로 구분한다. 주나라 후기에는 왕의 형식적인 권위가 남아있고 제후의 패자들이 국가간의 질서를 조정하였으나 기원전 5세기 말 이후에 7웅이 각축하는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일곱 개의 제후국은 치열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고 주나라의 권위는 이미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버렸다.굴원이 태어난 초(礎)나라는 남쪽에 있는 큰나라였다.그러나 무리한 국내정치의 개혁으로 분열이 생기고 있었다.군사력이 강해진 진(秦)나라의 세력이 커지자 초나라는 진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집단과 진나라에 끝까지 저항하려는 집단으로 분열되었다.굴원은 제나라를 위시한 다른 나라와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그는 교묘한 외교정책을 펼쳐 여섯 나라를 서로 대립시키고 각개 격파하려는 진나라의 작전을 무척 경계하였다.그러나 초나라의 정치가 중에는 진나라와 결탁하여 초나라를 도탄에 빠뜨리는 무리가 있었다.굴원은 나라는 어지럽고 정사(正邪)를 가릴 여력이 없는 초나라의 정치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초나라의 백성을 무척 사랑하였다.굴원이 먹라에 있는 연못에서 투신자살을 할 때에는 기원전 278년 5월5일이었다.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가엾게 여겨 대나무통에 쌀을 넣고 백단향 잎으로 둘둘 말아 물에 던져 그의 원혼을 달랬다.이후 이런 풍습은 띠나 대마무 잎에 싸서 찐 찹살떡이 되었다고 한다.5월5일 단오(端午)는 그의 혼을 달래는 의미가 되었다고 한다.초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때는 굴원이 투신자살한 지 약 50년이 지난 223년이다.전국시대의 여섯 나라는 멸망하여 진에 의하여 중국 통일이 실현되었다.진나라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이와 같이 대제국을 이룬 군주는 왕이라는 칭호가 걸맞지 않다고 생각되어 진나라의 중신들은 조정에 모여 숙의를한 후 새 칭호를 황제로 결정하였다.황은 지상에 빛나는 태양을 의미하며 제는 우주의 만물을 지배하는 최고의 존재를 뜻한다.진나라의 시황제(始皇帝)는 그가 죽은 이후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황제가 스스로 짐(朕)이라 칭하고 자기 이외에는 이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진나라는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그곳에 황제가 임명한 장관을 파견했다.군은 다시 현으로 나누었다.이를 군현제도라고 한다.전국시대에 전국 각지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던 문자와 화폐.도량형을 통일하였다.문자는 진나라에서 사용하던 전서체로 통일하였다.

 

 

 

 

 

 

 

 

 

 

 

 

 

 

 

 

 

 

맹강여라는 여인은 지아비를 위하여 따뜻한 옷을 지었다.그녀의 지아비는 만리장성을 쌓는 일에 강제 동원되었다.그녀가 들은 바로는 그곳은 북방의 추운 곳이라고 하였다.그는 북쪽을 향해 여행길에 나섰다.오랜 여행 끝에 만리장성에 도착했을 때 사랑하는 지아비는 이미 죽어 있었다.그녀는 지아비의 시체만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슬픔에 잠겨 대성통곡하고 있었다.그녀의 울부짖음에 갑자기 만리장성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흙에서 지아비의 시체가 나타났다고 한다.그녀의 이런 슬픈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 왔다.맹강여는 아마도 실존 인물은 아닐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그것은 만리장성이 많은 남자들의 목숨이 걸린 노동과 뒤에 남아 있던 여인들의 슬픈 눈물로 얼룩져 있음을 의미한다.지아비와 형제를 강제로 끌어내 만든 만리장성이 오히려 허물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여인들의 원한에 찬 목소리가 메아리쳐 오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대변되었을 것으로 회자되고 있는듯 하다.만리장성은 북쪽에 있는 흉노라 불리는 민족이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된 이후에 흉노족의 칩입에 대비하여 이미 전국시대부터 쌓아올렸던 것을 진나라때에 보강하여 완성한 것이였다.현재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14세기경 명나라 시대에 축성된것이다.흉노쪽은 말을 타고 달리며 화살을 쏘는 솜씨가 일품인 유목민족이다.만리장성은 이러한 흉노민족을 막기위한 목적이기라보다는 진나라는 북방의 유목민족과는 생활과 방식이 확실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위해 그 경계선을 긋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만리장성에 필적하는 진시황의 대규목 토목공사는 아방궁과 여산능의 건설이었다.아방궁은 스스로 우주의 최고 지배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걸맞게 지으려고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아방궁은 하늘의 중심으로 여겨졌으며 그 북쪽에 흐르는 위수는 하늘의 강이라고 생각되었다.여산은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서 동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13살에 왕위에 오른 진시황은 즉시 자신의 능을 만들기 시작했다.이것은 당시의 관습이었다.이 공사는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그 다음 왕때 완성되었다.1974년에 이 여산능 부근에서 병마용갱이 발견되었다.마치 2천 년 동안 땅 속 깁숙이 묻혀 있던 진시황의 군대가 갑자기 세상에 되살아난 듯 했다.이곳에는 여러 모양을 한 실제 사람 크기만 한 흙으로 빚은 병사 인형 약 7천개가 땅 속에 질서 정연하게 묻혀 있었다.똑같이 흙으로 빚은 말과 나무로 만든 전차도 전투체제로 배치되어 있었다.아방궁과 여산능의 공사에는 7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공사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지정된 날짜에 하루도 늦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법률과 규칙을 엄격하게 지켜야만 했다.지배자들의 이러한 통치방식이 백성들의 불만을 점차 고조시켜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마침내 기원전 209년에 " 왕후(王侯) 장상( 將相)이 어찌 씨가 있을 쏘냐 " 라고 구호를 외치면서 진승과 오광이 앞장선 농민반란이 일어나 진나라를 붕괴시켰다. 이어서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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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문명의 발원

 

 

 

 

 

 

 

 

 

황하(黃河, Yellow river) 또는 황하강(黃河江)은 5,464km.유역 면적은 75만 2443km²에 이른다. 강의 길이에 비하면 수량이 적은 편이고 유역 면적이 상당히 좁은 편이다. 수량은 심각할 정도로 적어서 건기에는 아예 건천이 될 때도 있을 정도이다. 현지 발음을 살려 황허라고도 한다.칭하이성 쿤룬산맥에서 발원하여 쓰촨성.간쑤성.닝샤후이족 자치구.내몽고 자차구.산시성.허난성을 지나 최종적으로 산둥성 둥잉시에서 발해만으로 유입된다.중국대륙에서는장강 다음으로 길고 지구에서 다섯 번째로 긴 강이다.황하는 황하문명의 젖줄이고 중국의 싱징이면 세계 4대 고대문명의 발생지이다.중국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인 중원이란 본래 황하 유역을 의미했다.황하의 수질은 흙탕물 수준으로 이미 선사시대부터 이어진 삼림파괴로 인해 토사가 엄청나게 유출되었기 때문이었다.중국 문명이 발전하며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 농경지로의 개간률과 목재 자원의 소비가 더욱 더 높아지고 이후 왕조에서도 꾸준하게 시행된 토목 공사 및 농경지 개척을 위해 항하 주변의 삼림을 싹 다 베어버리면서 급격하게 악화되었다.춘주전국시대에  " 황하가 맑아지기엔 백년이 걸릴 것이다" 라는 구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로 표현한 말이었다.토사가 많이 흐르기 때문에 조금만 강의 흐름이 늦어지면 강바닥에 토사가 쌓이곤 한다. 그래서 주변 지역이 평야지대가 되는 근방부터는 주변 농토보다 강바닥이 더 높은 천정천(天井川)이 되었지만 주변 제방으로 물이 넘치지 않도록 간신히 막는 상황이라 홍수가 한번 나면 제방이 터져 강의 흐름이 아예 다르게 바뀌어버린다. 황하는 크기만 엄청나게 컸지 뻑하면 홍수나 일으키고 토사유출이나 하는 답이 없는 강이였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강이 바로 황하문명의 탄생 및 유지를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황하는 홍수가 나면 주변을 박살내지만 그 후에는 상류에서 끌어온 많은 토사를 주변 농토에 뿌려주는데 이게 자연적으로 비옥한 비료를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척박하고 건조한 중원 지역에 부족하나마 수자원을 제공했다. 또한 치수를 위해서는 많은 인원이 필요하므로 자연스럽게 비옥한 토지에 대규모의 사람들이 살고 이를 체계적으로 묶을 정치 제도가 만들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홍수가 난 후에는 다시 토지구획을 정리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므로 문서 기록과 측량 등의 각종 기술이 발달하게 된다. 이것은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에서 발생한 이집트 문명과 동일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황하에서 발생한 문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더 나은 환경인 장강에서 발생한 문명보다 빠르게 발전하여 결국 장강에서 발생한 문명을 흡수하고 주변을 정복하여 중국 문명으로 가는 기초를 닦게 된다. 물론 장강에 비해 수량이 적고 불규칙하다는 한계 때문에 결국 숲과 정글이 많았던 강남 지역이 제대로 개척될수록 강남의 농업 생산력에 밀리면서 점점 경제적 주도권을 남쪽 지역에 빼앗기게 된다.황하 주변은 고대부터 북송시절까지 중국의 중심지역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황하의 황색은 황제의 색으로 지정할 정도로 숭상받았으며 또한 황하를 통해 하류로 대량으로 공급되는 황토고원의 고운 흙은 질 좋은 벽돌과 기와를 만들기에 적합하여 황하 유역 근처의 중국 전통건축은 다양하고 화려한 벽돌과 기와를 사용하는 건축기법이 크게 발달하였다.인류는 신석기시대에 도구를 만들었고 청동기 시대부터 문자를 사용해 문명을 시작했다. 따라서 4대 문명 발상지에서 고대국가가 탄생했다. 이집트나일강 .메소포타미아의 티크리스유프라테스강.인도의 인더스강.중국 황하 문명이다. 국가는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형태도 다양했다. 항하 유역은 비옥한 황토로 덮혀 있어 농경에 유리한 지역이었다.일찌기 선사시대부터 신석기 문화가 발전하였다.청동기시대에는 농업생산력이 더욱 발달하였다. 농사를 잘 지으려면 변화무쌍한 물을 알아야 한다. 물이 적으면 가뭄이 들고 많으면 홍수가 난다. 물길을 바꾸거나 가두는 치수를 하며 공동 작업을 잘 이끌 집단의 지도자가 필요했다. 이제 먹고 남는 잉여가 생겼고 잉여는 사유 재산이 되고 이로써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빈부의 격차가 커졌으며 이는 전쟁을 불러왔다. 집단 안과 밖의 빈부 격차는 농업 생산력이 발달할수록 더욱 커졌고 사회의 큰 불안 요소가 되었다. 이 갈등을 해결하는 것도 지도자의 몫이었다. 치수.전쟁. 갈등 해결 등 지도자의 역할은 점점 중요해졌다. 지도자는 더 많은 권력과 재산을 소유했다. 점차 지도자는 다수의 사람을 다스리는 지배자가 되었고그의 지배를 받는 지역까지 국가의 영역이 되었다.기원전 2500년 경 청동기와 문자를 사용하며 성을 쌓고 정치 조직을 갗춘 초기 고대 국가가 나타났다.기록상에 나타난 최초의 왕조는하(夏)왕조로 추정된다.전설 속의 하나라 우는 왕이 되기 전 황하강의 치수를 위해 13년간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의 노력으로 홍수의 피해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고 우는 결국 왕이 되어 하나라를 건국했다.기원전 1600년 경 탕왕은 하나라 폭군 걸을 몰아내고 商지방에 상(商)나라를 건국했다. 상나라 건국은 하늘의 뜻으로 순리라 여겨졌다고 한다.황하강 일대를 통치하였다.

 

 

 

 

 

 

 

 

 

 

 

 

 

 

 

상나라는 후기에는수도를 은허(殷墟)로 정하고 은(殷)나라로 불리웠다.청동무기와 제사.도구를 만들고 돌과 나무로 농가구를 제작하였다.태음력을 제작하여 제사와 농경에 이용하였다.국가의 중요한 일은 점술가가 점을 쳐서 신의 뜻을 결정하였다.점의 내용과 결과는 갑골에 새겨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한자의 원형이 되었다.지배층인 귀족과 피지배층인 평민과 노예로 구성되었다.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같이 매장하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19세기 베이징의 약재상에서 한 학자가 용의 뼈라고 불리며 말라리아 약으로 쓰이던 뼛조각을 사들였다. 이 뼈에는 한자와 비슷한 갑골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왕이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계시 받은 내용을 거북이 껍질이나 동물 뼈에 새긴 것이었다. 갑골문자의 주된 내용은 홍수나 가뭄. 농사. 가족. 전쟁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상나라 왕은 치수와 전쟁. 농업과 관련된 중요한 일들을 하늘에게 제사를 올려 결정하는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1928년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대규모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옛부터 은허는 은나라의 주거지 유적이라고 불리웠다.바로 이 지방에서 많은 갑골문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지역을 은나라의 도시 은허가 아닐까 추측했고 그것은 적중하였다.10년에 걸친 조사 결과 2만 5천 조각이 넘는 갑골문자와 청동기.토기.석기 등이 발굴되었다.농민들이 살았다고 추측되는 수혈식 주거지와 함께 훌륭한 궁전의 유적도 발견되었다.바로 은나라 왕이 살았던 도시였다.소둔천 근처 마을에서 발견된 10여기에 달하는 대규모 지하묘에는 죽은 사람의 관이 놓여 있는 정실이라는 방은 지하 10.5미터에 있었다.땅 표면에서부터 길이 뚫려 있는데 가장 긴길은 30미터나 되었다.정실의 밑바닥에는 아홉개의 구멍이 뚫려 있고 각각의 구멍에는 개를 곁에 두고 돌이나 청동기로 만든 창을 든 병사가 파묻혀 있었다.병사들은 은나라의 왕이 죽은 이후에도 왕을 지키키 위해 파묻힌 것이였다.이 뿐만 아니라 파묻힌 사체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정실로 통하는 남쪽길에는 사체 59구가 묻혀 있었다.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로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로 추정되며 왕이 살았을 때는 노예로 일했을 것으로 보인다.갑골문자의 해독과 은허의 발견으로 은나라에 대한 상당한 역사적 사실이 밝혔졌음에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기는 훨씬 많다.은허는 은나라 후기의 수도이다.그 이전에는 은나라의 수도는 상이라는 지방에 세워졌다고 알려져 왔다.현재 중국에서 은나라를 상나라라고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상나라는 하의 왕조를 쓰러뜨리고 세운 나라로 되어있다.이 하나라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도 현재 조사중이다.은나라는 서쪽에서 일어난주(周)나라에기원전 1050년 경에 멸망되었다.중국에서는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울 때는 천명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주나라 역시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을 대단한 폭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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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라이스와 0의 발견 

 

 

 

 

 

 

 

 

 

 

카레라이스의 발생지는 인도이다.카레란 각 가정에서 색다른 맛을 내기 위해 여러 가지 향료를 으깨어 가족의 입맛에 맞도록 섞어 만든 것이다.이렇게 만든 카레에 고기와 야채를 넣고 맛을 낸다.수북인 쌓인  밥위에 옅은 노란색의 카레와  짙은 빨간색의 액체 고추를 잔뜩 뿌린 편육과 검은 양고기를 즐겨 먹는다.양고기 카레의 본고장은 카시미르지방이다.이슬람교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북인도에서 데칸고원에 이르는 지방에서는 고기를 주원료로 한 요리가 유명하다.이것에 비해 힌두교도의 전통이 강한 남인도와 자이나교의 영향이 강한 서인도지방에는 야채요리가 많다.콩과 야채만으로 만든 카레도 있다.물고기를 주 재료료 만든 카레는 뱅갈지방과 아라비아해에 인접한 봄베이에서 케랄라지방에 걸쳐 있다.인도의 카레는 요리의 지역적인 차이가 있더라도 인도전체에 통일성을 주고 있다.인도는 다양한 가운데 통일이 있다.그것은 넓은 인도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종.민족의 역사가 걸어온 결과이다.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라비아숫자는 인도에서에 발명되어 원래는 인도숫자라고도 한다.인도인은 수에 대한 사고방식이 매우 날카로웠다.제단(祭壇)의 측정과 상거래상 필요때문에 고대로부터 숫자가 현저히 발달한 것이다.기원전 2세기경에는 이미 0에 대한 개념을 발견하였다.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0이라는 수를 사용하고 있지만 0이 있기 때문에 수천.수만.수억이라는 수를 열거할 수 있다.즉.수의 자릿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이다.인류가 수를 발견한 역사는 오래된다.그러나 수기 오랫동안 사용되었어도 0은 숫자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중국은 십.백.천.만 이라는 수의 표현 방법은 십진법으로 옛부터 사용되고 있었지만 0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수의 자릿수를 매기지 못했다.인도에서는 0은   "슈나" 또는 "공(空)"이라는 말로 표현했다.0을 그밖의 수와 똑같은 수로 간주하여 표시한 것은 인도인의 공적이다.브라마굽타가 628년에 완성한 천문학 서적에는 0의 계산법이 나타나 0이 숫자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고 있었다.0의 발견은 수학을 두 방향에서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하나는 -(마이너스) 발견으로 인도인이 처음 발견했다고 전해진다.다른 하나는 자릿수 매김에 기초가 된 기수법의 발명으로 수의 계산법을 두두러지게 진보시켰다.이러한 인도인의 수학이 8세기 후반에 이슬람제국의 압바스왕조에 소개되어 아라비아숫자를 발달시켰다.인도는 수학뿐만 아니라 학문.문화.사상이 오늘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델리 교외는 지름이 약 40센티미터에  높이가 약 7미터나 되는 철기둥이 세워져있다.이것은 굽타왕조시대 약 400년 경에 만들어졌다.굽타왕조 1대왕 찬드라의 승리를 기념한 유물로 6행의 기념문이 새겨져 있다.이 철기둥이 유명한 이유는 철의 순도가 99.97%로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이 철기둥에는 녹슨 부분이 없다.1500년 동안 태양의 뜨거운 열과 비바람을 계속 맞으면서도 어떤 흠집도 없다.고대인도인의 높은 기술을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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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강 갠지스

 

 

 

 

 

 

 

 

 

인도는 벵갈만과 아라비아해 사이에 있는 역삼각형 모양의 큰 반도이다.인도는 현재 14억2577만5850명으로 중국을 넘어선 인도공화국을 중심으로 파키스탄.방글라데시.네팔.스리랑카로 나뉘고 있다.그 넓이는 소련과 핀란드를 제외한 전유렵과 같다.따라서 이 지역을 대륙을 잇는다는 의미로 아대륙(亞大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인도반도는북쪽에 만년설이 쌓인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산맥으로부터 남쪽에 적도에서 8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코모린곶까지 펼쳐져 있다.인도대륙의 자연환경은 다양하다.비옥한 토지와 기온이 높고 비가 많이 오는 기후는 농작물을 빨리 자라게 한다.인도인의 생활은 안정되어 있지만 많은 비.대홍수.폭풍.한파를 때없이 일으켜 사람을 기습한다.때로는 메뚜기 같은 곤충이 떼를 지어 몰려와 농작물을 기습한다.대자연의 힘 앞에 인간의 노력은 너무나도 허무하다.인도대륙의 남쪽과 북쪽에 있는 사람들의 성격은 무척 다르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연에 대하여 순종하면서 산다는 것이다.그들 모두에게 자연의 위대한 힘의 상징은 갠지스강이다.갠지스강은 만년설 히말라야에서 시작된다.히말라야는 길이가 3천킬로미터나 되는 엄청난 산봉우리이다.히말라야의 각각의 산봉우리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시냇물은 평야에서 만나 갠지스강을 이룬다.이 강은 수천 년 동안 비옥한 토지를 이루어 수억 명의 사람과 무수한 생물의 젖줄이 되어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젖줄이 될 것이다.힌두교의 기원은 아리아인이 북서 인도에 칩입한 기원전 1500년 경이라고 알려지고 있다.유목을 생업으로 한 아리아인과 이 곳에 먼저 정착한 부족 문다족과 드라비다족의 농경문화가 융합한 것이 힌두교이다.북서 인도에서 형성된 원시 힌두교는 점차 갠지스강 유역일대에 퍼져갔다.힌두교의 교세 확장 과정은 무력을 사용한다든가 다른 부족의 문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같이 흡수하면서 성장하였다.힌두교에 신이 많고 특히 비시누신과 시바신이 여려 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힌두교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인도의 오랜 역사속에서 종교적 박해와 종교전쟁은 찾아 볼 수 없다.힌두교는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와 이슬람교의 마호멧과 같은 창시자가 없다.성서나 코란처럼 특정한 교리서도 없다.힌두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그들의 생활.관습.역사 그 자체이다.네팔의 딜라이지방은 히말라야산 기슭에 있는 분지였다.이 산기슭에 카필라바스투라 왕국이 있었다.기후가 온화하여 쌀농사가 번성했다.

 

 

 

 

 

 

 

 

 

 

 

 

 

 

 

 

약 2500년 전 이 왕국의 마야왕비가 잉태한 고타마싯달타가 바로 불교를 개창한 석가모니이다.석가모니는 석가족의 성자라는 의미이다.불교는 기독교.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3대 종교가 되었다.발생지가 인도이므로 일반적으로 인도라고 하면 불교의 나라로 생각하기 쉽다.그러나 불교도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인구의 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거의 85퍼센트가 힌두교이교 나머지가 기독교.이슬람교이다.이것은 인도의 풍토. 즉 갠지스강과 깊은 관계가 있다.인간에게 맹위를 떨치는 인도에서 갠지스강의 은혜만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도인은 갠지스강에 매일 감사기도를 드린다.갠지스강에서 태어나 갠지스강에 죽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축복이었다.우기가 끝난 직후의 갠지스강에는 탁한 색깔의 물이 흐른다.흡사 진흙탕물이 흐르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머리를 감고 살결을 문지르며 양치질을 하고 심지어 그 물을 마시기도 한다.이러한 행동은 갠지스강에서 목욕을하면 공덕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과학문명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인도에서 이들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합리성과 과학성을 자랑하던 불교는 점차적으로 고립돠어 갔다.약 8세기에 이르러 힌두교도 불교의 합리적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했어도 불교도 역시 힌두교에 흡수되어 그 자체를 감추어버렸다.바라나시는 갠지스강 중류에 발달한 도시이다.이 도시의 인구는 현재 약 130만명 정도인데 순레자는 연간 300만명이 넘는 순례자가 각지에서 모인다.바라나시는 인도의 주신 시바신의 마을이다.이 곳에 있는 골든 템플이라고 불리는 절을 비롯해 2천 개가 넘는 사원이 시바신을 기리고 있다.바로 힌두교의 최고의 성지이다.강가에는 장장 5킬로미터나 되는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다.사람들이 계단을 따라 갠지스강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예배를 드린다.이 목욕탕을 가트라고 부른다.강가를 따라 설치되어 있다.힌두교도는 성지 바라나시를 순례하고 갠지스강에서 몸을 씻으면 죽은 이후 하늘나라에서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갠지스강 다사슈와메두 가트 부근은 대단히 번잡한 곳이다.다사슈와메듀보다 조금더 상류로 올라가면 마니카르니카 가트가 있다.이곳은 화장터의 가트이다.들것 위에 하얀색과 붉은색의 베로 싼 시체를 운반한다.사체는 갠지스강에 담근 다음 쌓아올린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핀다.화장을 하고 유해는 갠지스강에 버린다.그들은 어머니의 강 갠지스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영혼의 영원한 고향 갠지스강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도인의 이상이다.오늘도 갠지스강가에는 보라색의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오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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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문명과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인도대륙의 북서부에 인더스강이 흐르고 있다.히말라야산맥에서 시작되어 펀잡지방을 지나 아라비아해에 이르는  큰 강이다.인더스강 유역에는 강우량이 적어 불모지가 많다.평야지대라고 하더라도 군데 군데 밀밭이 흩어져 있다.인더스강 하류에 있는 황량한 언덕위에 벽돌로 만든모헨조다로 유적이 나란이 서있다.이렇게 황량한 지역이 어떻게 세계4대문명의 발상지가 되었을까?사막과 같은 이 지역도 기원전 3000년 경에는 비가  많이 오는 울창한 삼림지대였다.인더스강 유역의 고대도시에는 가마에서 구운 벽돌을 대단히 많이 사용했다.점토에 모래를 섞어 짓이겨 굳힌 것을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어 가마에 구우면 벽돌이 완성된다.현재에도 벽돌 공장은 인도 각지에 서 있다.공장에는 철로 만든 굴뚝 하나가 서있다.도시를 건설하는데에는 벽돌이 많이 사용되었다.벽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료가 되는 나무가 대량으로 필요했다.인더스강 유역의 울창한 삼림의 나무는 이런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인더스강 유역에는 호랑이.물소.코끼리.코뿔소 등으로 밀림과 늪지대에 사는 동물이 많았다는 흔적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기후변화도 인더스강을 메마르게 한 원인이 되었다.대서양의 저기압이 북아프리카를 지나 인더스강에 비를 뿌려주었으나 오늘날에는 저기압이 방향을 바꾸어짐에 따라 비가 오지않아 메마른 풍토를 가져다 준 것이다.특히 몽고군의 칩입으로 바빌론지역의 관개용수로의 파괴는 결정적으로 이 지역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렸다.인더스문명의 유적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60곳 이상이 발견되었다.강 하류에 있는 모헨조다로와 650킬로미터 위쪽의 펀잡지방에 있는 하랍파기 대표적인 유적지대이다.19세기 후반부터 알려진 이 유적들은 유적지대 인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과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인들에 의하여 파괴된 것은 놀라운 일들이었다.마을사람들은 집을 짓기 위해서 유적의 벽돌을 가져다 쓰고있었다. 더 난폭한 발상은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서 철도 아래에 까는 자갈로 이용하기 위하여 고대유적의 벽돌을 이용한 것이였다.1천 킬로미터가 넘는 구간에 고대도시의 유물이 개발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사용되었다.영국인들은 인류의 중요한 유산을 파괴해버린 것이었다.21세기에 들어서서 모헨조다로와 하랍파의 유적에서 도장들이 발견되었다.한 변의 길이가 2센티미터 내지 4.5 센티미터인 사각형 활석이다.그 위에 물소와 코뿔소의 동물과 그림문자가 새겨져 있었다.모헨조다로에서 1200개 이상.하랍파에서 330개가 발견되었다.그림문자의 종류는 400개나 되었다.도장의 발견으로 인더스강 유역에 같은 문자를 사용한 인류가 존재했음이 밝혀졌다.이로서 지금까지의 인류문명발상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이어 인더스문명이 하나 더 보태게 된 것이다.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문명을 쌓아올린 종족은 수메르인이었다.그들 도시의 중심은 신에게 제사지내는 신전이었다.이곳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지식이 많은 장로가 제사를 주재했다.신관직은 대대로 이어져갔으면 신관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었다.마침내 그들은 왕이 되어 신전과 궁전을 건축했다.이집트의 왕실도 이러한 대표적인 문명이 태동시킨 것이다.

 

 

 

 

 

 

 

 

 

 

 

 

 

 

 

 

 

 

인더스문명도 다른 고대문명과 같이 반드시 신전이 있을 것이라고 발굴팀은 생각하게 되었다.발굴이 시작되고 3년이 지난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모헨조다로 성벽의 북쪽에서 동서의 길이가 23미터 남북이 55미터나 되는 건축물이 발견되었다.이는 여러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수영장 규모의 목욕탕인 것으로 추정되었다.동쪽에 있는 우물로부터 물을 끌어왔던 것으로 보인다.더러운 물은 서쪽으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고 남쪽과 북쪽에는 계단이 있다.이는 5천년 전의 유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아주 튼튼한 내부구조를 갖추고 있었다.오늘날에도 인도의 영험한 곳에는 사각형 연못이 있다.인도인은 이러한 곳에서 목욕하는 관습이 있다.이러한 관습을 보더라도 이렇게 큰 목욕탕은 단순한 몸을 씻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게 된다.이것은 목욕재계의 의미를 가진 종교적인 행사를 하기위한 장소로 여겨진다.인더스문명에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와 같은 신전이나 궁전은 발견되지 않았다.따라서 이와는 다른 신권정치가 펼쳐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모헨조다로의 거리를 걸어가면 집집마다 우물이 있다.이 우물들은 윗부분을 겹겹히 쌓아간 것으로 나타난다.이것은 인더스강이 여러 번 홍수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말해준다.홍수가 날 때마다 모래와 진흙이 우물에 쌓이기 때문에 우물에 모래와 진흙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우물 입구를 더 높히 쌓은 것이다.홍수로 부서진 집위에 새 집을 얹고 개축된 형식으로 매번 다시 재건된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각각의 집에는 우물.목욕탕.양변기식 화장실이 있다.오물은 배수관을 통해 집 밖에 있는 오물통으로  나간다.오물통에 있는 쓰레기는 밑바닥에 가라앉게되고 위에는 액체만 남게된다.이 액체만 도로 밑에 벽돌로 설치한 하수구로 흘러보낸다.나머지는 시의 위생담당부서에서 정기적으로 수거해 간다.로마문명 이전에 이만큼 휼륭한 하수처리 시설을 갖춘 문명은 찾아볼 수 없다.또한 두터운 벽 가운데 쓰레기 처리용 배수관이 들어 있다.이 배수관은 2층에서 1층으로 통한다.현대 고층건물에서 쓰레기를 아래로 떨어뜨리는 굴뚝처럼 생긴 더스트 슈트와 같다.배관을 통해 쌓인 쓰레기는 역시 시의 위생담당부서에서 치운다.이런 사실을 보아 인더스문명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청결하고 위생적인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또한 계획적인 도시계획을 실시하는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행정기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인더스 문명에서는 다른 문명과는 달리 무기류가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 점이다.이러한 사실은 인더스문명을 지탱한 힘이 무기와 권력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강력한 군대가 아니었다면 어떠한 힘으로 사람을 통제했을까 수수께끼 처럼 의문이 생긴다.인더스문명이 발견된지 반 세기가 자났음에도 불구하고 문자는 아직까지도 해독되지 못했다.문자의 수는 400종류에 이른다.이렇듯 인더스문명에는 해명되지않은 역사적 사실이 많다.도장에 새겨진 문자가 해독된다면 수수께끼는 어느 정도 해명될 것이다.이러한 가운데서도 단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그것은 인더스강 유역에 있는 하나의 민족이 중심이 되어 거대한 도시문명을 구축했으며 이 문명은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인에 의해서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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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대왕과 페르시아 제국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는 이란 남부의 파르스 지방에 위치했던 고대 도시와 그 유적으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수도였다. 고대 페르시아 수도답게 거대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페르시아만에 인접한 파르스는 페르시아인의 고향이다.이곳의 중심지 시라즈는 재그로스산맥 가운데 높이가 1500미터나 되는 분지에 있다.분지의 끝에 수목이 없는 바위산에 다리우스대왕이 건설한 페르세폴리스궁전의 유적이 있다.페르세폴리스궁전이 건축된 파르스지방은 북쪽에 있는 바르미아호수 부근에 정착한 이란계 유목민 가운데 한 종족이 재그로스산맥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횡단해 당도한 곳이다.그들이 남하한 때는 기원전 700 년 경이었다.페르시아인은 10개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이 10개의 부족을 통일한 사람은 아케메네스로 아케메네스 왕조를 열었다.그의 후손인 키로스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이끌었다.페르시안들은 신이 늘 천개의 귀와 만개의 눈으로 온세계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면 엄한 벌을 내린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기원전 522년 9월29일 밤 페르시아 제국 2대왕 캄비세스2세의 이집트 정벌에 따라나섰던 7명의 귀족이 파사르가디에 있는 왕국의 문을 통과하여 왕위찬탈을 시도한 무리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궁정으로 들이닥쳤다.이들은 캄비세스왕을 속이고 즉위한 가우마타 일당을 모두 살해한 후 민중들에게 이들이 가짜임을 알렸다.당시에 캄비세스 2세는 이디오피아 원정에 실패하자 자책감으로 자살하고 말았다.비어있는 왕의자리에 7명의 귀족들이 상의한 결과 아케메네스의 후손인 다리우스를 페르시아 제3대왕으로 선출하였다.당시 다리우스는 28살이었다.왕으로 선출된 다리우스는 페르시아를 창건한 키로스왕의 두 딸과 결혼 했다.이후 그는 페르시아제국의 영광과 함께 대왕으로 불리웠다.즉위한지 2년 동안에 19회나 전쟁을 치렀으며 반란을 일으킨 9명의 제후를 진압해 페르시아제국의 영광을 되찾았다.바그다드에서 테헤란으로 향해 동서무역로가 있는 재그로스산맥의 길목에 있는 바위산을 깎아 거대한 기념비문을 새겨넣었다.그 비문에는 다리우스대왕의 업적이 고대 페르시아어.엘람어.바빌로니어 등 3개국 설형문지로 적혀 있다.다리우스대왕은 서쪽으로는 소아시아 리디아와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동쪽으로는 인도와 펀잡지방까지 대제국을 쌓아올렸다.

 

 

 

 

 

 

 

 

 

 

 

 

광대한 영토를 유지히기 위해 수도 수사에서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사르테스 거리에 이르는 군용도로 "왕의 길" 2683 킬로미터를 건설하였다.이전에 90마일 걸렸던 길을 불과 7일만에 달릴 수 있게 되었다.해상교통로에도 힘을 기울여서 3단의 해상 운송선 두 척이 나란이 지날 수 있고 4일 동안의 항해로 통과할 수 있는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팠다.후에 수에즈 운하를 건설할 때 발견된 페르시아왕의 비문에는 "배는 우리 뜻대로 이집트에서 이 운하를 지나 페르시아에 도착했다" 라고 새겨져 있었다.다리우스대왕은 제국을 20주로 나누어 주지사를 임명하고 해마다 공납해야 하는 조세액을 정했다.페르세폴리스궁전의 신년 하례식에는 다리우스대왕이 지배한 23개 민족의 사절단이 줄지어 몰려왔다.티그리스유라테스강 주변에 사는 엘람인은 모자대신 끈을 둘둘 말고 암사자와 두마리의 새끼사자를 끌고.아프가니스탄의 아라코시아인은 물주전자와 낙타를.이집트인은 큰 소와 직물을.바빌로니아인은 귀금속과 들소를.인도의 칸다라인은 회살과 창 그리고 들소를.아라비아인은 직물과낙타를.이디오피아인은 항아리.상아와 기린을 이끌고 궁전으로 들어왔다.이 궁전에서 왕의 일족을 포함하여 날마다 1만5천명이 식사를 했기 때문에 그 비용도 엄청나게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페르시아인들은 불을 숭배하는 민족이었다.그러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접하면서 여러 자연신들까지 숭배하게 돠었다.신들에 대한 의식은 마기라는 사제들에 의해서 집행되었다.이러한 종교적 의식은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러 예언자 조로아스터에 의해 신학과 우주관을 갖춘 종교로 재조직돠었다.우주 최고의 신 아후라 마즈다는 모든 신을 지배하는 신이다. 어둠과 악의 신인 아리만은 악령 다에바스를 지위하여 모든 선을 위협한다고 규정했다.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선과 악은 서로 싸우게 돠는데 승자는 후라 마즈다이다.악한자는 세상의 종말 후 고통을 받으며 선한자는 천상에서 축복을 받으며 살게 된다고 한다.다리우스대왕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조로아스터교는 계속 발전하여 태양신 미트라가 인간의 구원을 돕는 신으로 추가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문자로는 알파벳 형태로 쓰여진 아랍어가 제국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다.다리우스대왕이 살아 있던 페르시아제국은 훌륭한 통제력과 페르시아인의 단결로 유지되었으나 대왕이 죽자 대신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200여 년 동안 영광을 누린 페르시아제국도 기원전 330년에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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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제국의 영광

 

 

 

 

 

 

 

 

 

 

 

 

 

오늘날 이란인이라 불리우는 인도.유렵어족 일파는 기원전 2천년 경 중앙아시아에 출현하였다.그들은 기원전 1천년 경에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부지역에 이르렀으며 그곳에 정착하여 고대 오리엔트 문화를 흡수하였다.기원전 7세기에는 이란인의 일파인 메디아인들이 앗시리아로부터 독립하여 국가를 세웠다.그들은 카스피해에서 다뉴브강 유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던 스키티아인들을 격파하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지배하였다.이후 메디아 왕국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자그로스산의 동쪽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는 이루지 못했으나 혈연 관계에 의한 중앙권력과 연결된 속주들이 합해진 연방체였다.기원전 612년에 이르러  앗시리아를 붕괴시키기 위해 바빌론인들과 연합할 정도로 그 위세가 커지게 되었다.앗시리아가 멸망하지 메디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중앙아시아에서 리디아 왕국과 경계인 소아시아 힐리스 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그러나 메디아 왕국은 이에 만족치 않고 아스티아케스왕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장악하려들자 신바빌로니아 나보니두스왕은 아스티아케스왕의 손자인 아케메네스 왕가의 키루스와 동맹을 맺고 메디아 왕국에 대항하였다.기원전 559년에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케스왕은 키루스에 의해 축출되었다.왕국의 지배권은 아케메네스 왕가로 넘어가서 페르시아 왕국이 시작되었다.그러나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은 근본적으로 같은 아리아 민족이었으므로 실제적인 큰 변화는 없었다.

 

 

 

 

 

 

 

 

 

 

 

 

 

 

 

여세를 몰아 키루스왕은 중앙아시아와 중동지방 전체를 통합하는 대정복 사업에 착수하였다.소아시아의 리디아 왕국을 정복하였고 소아시아 해안 지대의 그리이스 도시들을 정복하였다.이때가 기원전 540년 경이다.기원전 539년에는 오리엔트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하여 바빌론으로 진격하였다.그러나 키루스왕은 앗시리아 멸망의 교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히 정복한 영토들에 대해 지극히 관대한 정책을 펄쳐 정복지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주었다.헤브라이인들과 그 밖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해방자로 간주되었던 것도 그의 관용정책이 통했기 때문이었다.키루스왕이 이집트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즉위하고 나서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정복사업을 이어나가 이집트를 페르시아에 병합시키고 자신은 이집트 제 27왕조의 왕이 되었다.그러나 왕이 이집트에 머무르는 동안 본국에서 왕위 찬탈 사건이 벌어지고 자신이 진두 지휘한 이디오피아 원정에서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본국에서 왕위 찬탈사건을 수습하고 새로운 왕위에 오른 사람은 다리우스1세(기원전 522-486년) 였다.그는 후에 그리이스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그의 치세하에서 페르시아는 인도에서 트라키아에 이르는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당시에 페르시아를 물리친것은 오로지 그리이스 뿐이었다.페르시아 속주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에서 페르시아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연결하는 대로는 그 거리가 1600마일에 달했다.경제 생활에 있어서는 표준적인 도량형이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다.지방세는 다릭이라고 불리는 금화로 징수되었다.페르시아인은 세금이 면제되었다.페르시아왕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주요 신들의 대리자로 간주되었다.또한 페르시아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여러 곳에 수도를 세웠다.수사나 페르세펠리스는 대표적인 도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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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세계의 왕 최초의 세계제국

 

 

 

 

 

 

 

 

 

 

 

앗시리아인들은 남쪽의 바빌로니아왕국이 강력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지배하에 있었다.그 고난의 시대는 실로 1천 년 가까이 계속되었다.앗시리아가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등장한 때에는 기원전 1000년 경이었다.철의 왕국 힛타이트왕국이 더 강한 철기문화를 가진 프리키아인에게 멸망당하고 난 이후 맨 먼저 제철법을 배워 철제무기로 강한 군대를 무장시켰다.두 마리의 말이 끄는 2륜마차는 기동성이 뛰어나 기병대와 함께 위력을 발휘했다.도시의 성벽을 파괴하는 공성기도 개발했다.기원전 670년에 이집트를 정복하기에 이르면서 오리엔트 전 지역을 제패하고 사방세계의 왕이 되면서 앗시라아를 최초의 세계제국으로 만들었다.앗시라아 새 수도 니네베의 대궁전에 는 전쟁 포로와 반란자를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하는 장면을 그린 큰 벽화가 걸려 있다.각국의 사자들은 이 벽화를 보고 앗시리아에 반항하면 매우 잔혹한  처벌에 직면할 것임을 간파하고 돌아갔다고 한다.정복지의 주민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그 곳에 다른 지역에서 끌고온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이주정책도 시행했다.앗시라아는 수메르.악카드인에의해 시작되고 바빌로니아인에 의해 발전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계승하였다.앗슈르반아플리왕은 과거의 문헌을 보관할 거대한 도서관을 세우고 서기들은  정확한 사본을 편집하고 거대한 비판적인 주석을 써 넣었다.또한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연대기도 편집되었다.천문학.수학 등의 학문연구가 활발하였으며 식물학은 왕들이 큰 관심을 가진 분야였다.앗시리아인들은 과거의 문명과 인근의 문명이 사용하던 소재들을 독창적으로 종합하여 고도로 발달된 예술품을 남겼다.대궁전의 건축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벽돌과 힛타이트의 석재를 함께 사용하였다.궁전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부조로 장식했는데 그 묘사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였다.

 

 

 

 

 

 

 

 

궁전이나 성벽의 문에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거대한 날개가 달린 황소의 거상이 버티어 서서 한층 더 위엄을 더해 주었다.이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후대에 계승되어 페르시아 문명의 한 요소가 되었다.앗시리아의 전성시대는 기원전 7세기 중엽 앗슈르반아플리왕 시대였다.그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 원정군을 파견해 지배를 강화함과 동시에 학문과 에술을 장려해 문화향상에도 힘썼다.수도 니네베에 건설한 거대한 도서관에 앗시리아 제국의 기록만이 아니라 옛날 수메르인과 악카드인 시대의 기록도 모아두었다."나는 수메르의 그림과 같은 문자와 이해하기 어려운 악카드어를 읽는 법을 배웠다.악카드어를 완전히 읽고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기 전부터 있던 비석을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읽을 수 없어서 속태우고 노여워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문자에 홀린적도 있었다" 이것은 왕 자신이 쓴 문장이다.그는 지난 역사를 애써 배우기를 좋아한 왕인 듯하다.그러나 앗시리아도 그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이란 고원에서 새로히 등장한 메디아인과 오랜 역사를 가진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으로부터 공격받고 기원전 612년에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앗시리아의 도서관과 궁전은 함께 사막에 파묻힌 이래 2천 수백년 동안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았다.그러다가 마침내 19세기 중엽 에 영국의 학자가 이것을 발견하게 된다.점토판에 적힌 2만 7천점에 달하는 귀중한 기록은 현재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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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초승달 지역  앗시리아 제국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란 서쪽으로는 지중해와 맞닿고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막과 접하며 북으로는 타우르스 산맥그리고 동쪽으로는 자그로스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이 지역 내에서도 지중해  연안지역 특히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은 매우 비옥하였다.그리이스인들은 이 지역을 "강과 강 사이에 있는 땅" 이라는 뜻으로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렀다.이 지역은 인류 역사상 초기부터 문명 발달의 중요한 본산지였다.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많은 도시국가들이 탄생했다.앗수르도 그 중의 하나이다.이 도시는 티그리스강 유역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와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앗수르라는 이름은 이 도시를 소유한 태양신 앗수르에서 유래한 것이다.앗시리아인이라는 민족도 앗수르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앗시리아인은 아모리인과 바빌로니아인과 같은 셈족 계통의 민족이다.앗시리아인은 고대 세계의 무대에 거의 드러내지 않다가 기원전 1400년 경 후리인들이 지배하던 마탄니 왕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틈을 타서 그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앗시리아인들은 제국을 건설하고 티쿨티니누르타 1세(기원전 1242-1206) 때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바빌로니아를 단숨에 정복해버렸다.기원전 1200년 경에 철기를 사용하는 아랍인들의 칩입으로 인해 앗시리아의 팽창정책은 잠시 중단되었다.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는 후리인과 연관이 깊은 우라르투인과 철의 왕국 힛타이트를 붕괴시킨 새로운 철기문화의 주인공 프리키아인 등이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난관속에서도 앗시리아인들은 아다드나라리 2세(기원전 911-891년) 때에는 서쪽으로 정복사업을 이어갔고 나시르 아플리2세(기원전 883-859 년) 때에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주요 도시인 카르세마쉬를 정복하고 지중해까지 진출하여 페니키아 연안 도시들을 조공국으로 만들었다.이어서 그의 아들 살마나사르3세(기원전 859-824년)에는 다마스커스를 차지하고 이어서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잠시 우라르투인에게 바빌론을 빼았겼으나 기원전 746년에서 727년까지 티글라트 필레세르3세는 우라르투인을 격파하고 시리아를 탈환하여 바빌론의 왕이 되었다.앗시리아왕은 앗수르 신과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의 대리자로서 위엄을 만방에 떨쳤다.이후 샤르곤 2세 때에는 이스라엘 왕국 사마리아를 파괴하였다.이어서 프리키아인들을 멀리 밀어내고 키메라아인들의 칩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그의 후계자 센나케리브(기원전 706-681년) 왕은 유다왕국을 제후국으로 만들고 유프라테스강변에 니네베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중심지로 삼았다.앗시리아는 강력한 정복사업으로 비록 단기간에 그쳤지만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통합하여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민족이 되었다.그러나 정복 일변도의 확대정책은 내실을 굳히지 못하였고 잔혹한 정책으로 정복지 주민의 신용을 얻지 못하였다.기원전 612년에 북쪽의 새로운 강국인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의 합동으로 니네베 시가 함락되고 뒤이어 리디아.이집트등 여러 왕국이 칩입으로 앗시리아제국은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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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H안소니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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