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9. 17:42 세계사속으로2
9.춘추전국시대와 진시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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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와 진시황제
주(周)나라(기원전 1024년-256년)는 상나라에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이며 790년간 왕조를 이어갔다.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허강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의 천자로서 중원(中原)을 지배했다.최근 조사에 따르면 주나라 청동기 문화권 영향력은 중원에서 더욱 남쪽 지방인 장쑤(江蘇).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등 장강유역까지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주나라 시기에 넓은 영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봉건제의 개념이 등장하였다.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였고 농지 개척을 진척하였으며 농기구는 목재나 석재로 만들었다.학계는 주나라 시기부터 중국에서 철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771년 견융이 주나라를 침략하여 유왕을 살해하여 제후들이 그의 뒤를 이을 평왕을 옹립했고 곧 이어 현재의 시안부근 호경(鎬京)에서 부도(副都) 낙읍(洛邑)으로 수도를 옮겼다.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 라고 하고 이후를 동주(기원전 770년 ~ 기원전 256년)로 구분한다. 주나라 후기에는 왕의 형식적인 권위가 남아있고 제후의 패자들이 국가간의 질서를 조정하였으나 기원전 5세기 말 이후에 7웅이 각축하는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일곱 개의 제후국은 치열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고 주나라의 권위는 이미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버렸다.굴원이 태어난 초(礎)나라는 남쪽에 있는 큰나라였다.그러나 무리한 국내정치의 개혁으로 분열이 생기고 있었다.군사력이 강해진 진(秦)나라의 세력이 커지자 초나라는 진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집단과 진나라에 끝까지 저항하려는 집단으로 분열되었다.굴원은 제나라를 위시한 다른 나라와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그는 교묘한 외교정책을 펼쳐 여섯 나라를 서로 대립시키고 각개 격파하려는 진나라의 작전을 무척 경계하였다.그러나 초나라의 정치가 중에는 진나라와 결탁하여 초나라를 도탄에 빠뜨리는 무리가 있었다.굴원은 나라는 어지럽고 정사(正邪)를 가릴 여력이 없는 초나라의 정치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초나라의 백성을 무척 사랑하였다.굴원이 먹라에 있는 연못에서 투신자살을 할 때에는 기원전 278년 5월5일이었다.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가엾게 여겨 대나무통에 쌀을 넣고 백단향 잎으로 둘둘 말아 물에 던져 그의 원혼을 달랬다.이후 이런 풍습은 띠나 대마무 잎에 싸서 찐 찹살떡이 되었다고 한다.5월5일 단오(端午)는 그의 혼을 달래는 의미가 되었다고 한다.초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때는 굴원이 투신자살한 지 약 50년이 지난 223년이다.전국시대의 여섯 나라는 멸망하여 진에 의하여 중국 통일이 실현되었다.진나라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이와 같이 대제국을 이룬 군주는 왕이라는 칭호가 걸맞지 않다고 생각되어 진나라의 중신들은 조정에 모여 숙의를한 후 새 칭호를 황제로 결정하였다.황은 지상에 빛나는 태양을 의미하며 제는 우주의 만물을 지배하는 최고의 존재를 뜻한다.진나라의 시황제(始皇帝)는 그가 죽은 이후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황제가 스스로 짐(朕)이라 칭하고 자기 이외에는 이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진나라는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그곳에 황제가 임명한 장관을 파견했다.군은 다시 현으로 나누었다.이를 군현제도라고 한다.전국시대에 전국 각지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던 문자와 화폐.도량형을 통일하였다.문자는 진나라에서 사용하던 전서체로 통일하였다.
맹강여라는 여인은 지아비를 위하여 따뜻한 옷을 지었다.그녀의 지아비는 만리장성을 쌓는 일에 강제 동원되었다.그녀가 들은 바로는 그곳은 북방의 추운 곳이라고 하였다.그는 북쪽을 향해 여행길에 나섰다.오랜 여행 끝에 만리장성에 도착했을 때 사랑하는 지아비는 이미 죽어 있었다.그녀는 지아비의 시체만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슬픔에 잠겨 대성통곡하고 있었다.그녀의 울부짖음에 갑자기 만리장성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흙에서 지아비의 시체가 나타났다고 한다.그녀의 이런 슬픈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 왔다.맹강여는 아마도 실존 인물은 아닐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그것은 만리장성이 많은 남자들의 목숨이 걸린 노동과 뒤에 남아 있던 여인들의 슬픈 눈물로 얼룩져 있음을 의미한다.지아비와 형제를 강제로 끌어내 만든 만리장성이 오히려 허물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여인들의 원한에 찬 목소리가 메아리쳐 오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대변되었을 것으로 회자되고 있는듯 하다.만리장성은 북쪽에 있는 흉노라 불리는 민족이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된 이후에 흉노족의 칩입에 대비하여 이미 전국시대부터 쌓아올렸던 것을 진나라때에 보강하여 완성한 것이였다.현재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14세기경 명나라 시대에 축성된것이다.흉노쪽은 말을 타고 달리며 화살을 쏘는 솜씨가 일품인 유목민족이다.만리장성은 이러한 흉노민족을 막기위한 목적이기라보다는 진나라는 북방의 유목민족과는 생활과 방식이 확실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위해 그 경계선을 긋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만리장성에 필적하는 진시황의 대규목 토목공사는 아방궁과 여산능의 건설이었다.아방궁은 스스로 우주의 최고 지배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걸맞게 지으려고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아방궁은 하늘의 중심으로 여겨졌으며 그 북쪽에 흐르는 위수는 하늘의 강이라고 생각되었다.여산은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서 동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13살에 왕위에 오른 진시황은 즉시 자신의 능을 만들기 시작했다.이것은 당시의 관습이었다.이 공사는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그 다음 왕때 완성되었다.1974년에 이 여산능 부근에서 병마용갱이 발견되었다.마치 2천 년 동안 땅 속 깁숙이 묻혀 있던 진시황의 군대가 갑자기 세상에 되살아난 듯 했다.이곳에는 여러 모양을 한 실제 사람 크기만 한 흙으로 빚은 병사 인형 약 7천개가 땅 속에 질서 정연하게 묻혀 있었다.똑같이 흙으로 빚은 말과 나무로 만든 전차도 전투체제로 배치되어 있었다.아방궁과 여산능의 공사에는 7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공사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지정된 날짜에 하루도 늦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법률과 규칙을 엄격하게 지켜야만 했다.지배자들의 이러한 통치방식이 백성들의 불만을 점차 고조시켜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마침내 기원전 209년에 " 왕후(王侯) 장상( 將相)이 어찌 씨가 있을 쏘냐 " 라고 구호를 외치면서 진승과 오광이 앞장선 농민반란이 일어나 진나라를 붕괴시켰다. 이어서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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