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안소니백세건강노트 :: '세계사속으로1' 카테고리의 글 목록

반응형
세계사속으로1
반응형
반응형

 

 

 

●바빌로니아 함무라비대왕과 최초의 성문법전

 

 

 

 

 

 

 

 

 

 

 

20세기초에 프랑스 유적발굴대는 페르시아 수도였던 수사에서 지름이 61센티.높이가 2.2미터인 검은 돌로 만들어진 둥근 기둥을 발견하게 된다.그 둥근 기둥에는 설형문자로 된 조문 282 가지가 새겨져 있고 위쪽에는 태양신 사미시로부터 법전을 받는 함무라비왕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이것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전 함무리비 법전이다.바빌론이 화려한 강대국으로 떠오른 것은 고바빌로니아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왕 시절부터였다. 함무라비는 탁월한 외치와 내정 능력으로 작은 마을이었던 바빌론을 거대한 도시로 확장했다.함무라비는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혼란스러웠던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재통일했고 이때 이후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은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함무라비왕의 4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바빌론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했다.바빌로니아인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함무라비 법전이다.함무라비 법전은 높이 8피트의 딱딱한 돌기둥에 새겨져 공포되었다.이 법전은 거의 4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이 보다 앞서 수메르인.아카드인들도 성문 법률을 갖고 있었는데 함무라비왕은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세계 최초의 성문 법전을 편찬하였던 것이다.법전의 머리글에 함무리비왕은 법전 공포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정의를 온 나라에 빛나게 하기 위해.나쁜자를 멸망하기 위해.강자가 약자를 학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과부와 고아가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하기 위해.평민이 가렴주구하는 악덕 관리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를  실천하기 위한 욍의 첫 번째 의무는 법과 의무를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고루 미치게 하는 것이 였다.두번째 의무는 도시와 그 주변의 토지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고 영토를 유지.확대하는 것이였다.왕은 이를 위해 관리와 병사에게 왕실의 토지를 주었으며 그 대가로 왕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었다.전투.외교.군사의 소집 등은 모두 왕의 중요한 의무였다.

 

 

 

 

 

 

 

 

 

세번째는 신전을 건설.수리하고 농지를 에워싸고 흐르는 관개용 운하를 확대하는 일이였다.함무라비왕은 이와같은 왕의 의무를 충분히 완수했다.바빌론을 근거로 기원전 1724년부터 1682년까지 재위 기간 43년 동안 여러 도시를 정복해 고대 바빌론 왕국을 강성한 국가로 만들었다.함무라비법전의 특색가운데 첫번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것과 같이 대등한 복수를 공인하고 있는 것이 있다.이를 복수법이라고 한다.그러나 함무라비법전의 복수법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귀족이 평민의 눈을 못쓰게 만드는 경우에는 은 1마나를 지불하면 된다." ." 만약 어떤 사람이 노예의 눈을 못쓰게 만드는 경우에는 그 반액을 지불하면 된다."이렇게 똑같은 범좌라 하더라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당시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복하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한 종족은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이었다.그들은 원래 황야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거치른 유목생활에서 엄격한 규율을 통제하기 위해서 동족사이에서 적용하던 복수법을 피정복자인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차별이 발생함에 따라 동등하게 적용할 수는 없었다.따라서 함무라비법전은 귀족.평민.노예라는 신분차별을 규정하고 있는 법이었다.바빌로니아 경제를 지탱하는 것은 귀족과 평민에 의한 농업과 상업이었다.도지 주변의 토지에는 염분이 많아 적당한 보리가 재배되었다.보리로 빵을 만들고.대추야자.양털로짠 옷감.건축자재 등의 물물교환이 성행했다.상인들은 대상을 이끌고 서쪽으로는 시라아사막을 거쳐 지중해연안으로 갔고.동쪽으로는 재그로스산맥을 넘어 이란 방면.배를 타고 페르시아만을 경유하여 인도에 가기도하고.아라비아해를 횡단해 동아프리카 이디오피아.소말리아와도 무역을 했다.이렇게 상인등의 활약으로 문화교류도 활발해져 메소포타미아인의 시야는 넓어져갔다.정의를 온 나라에 빛나게 한 함무리비왕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 걸친 대제국을 이루어 놓았다.성벽으로 둘러싸인 수도 바빌론은 오리엔트 중심도시로 번창했다.그러나 함무라비왕이 죽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운이 쇠약해졌다.기원전 1550년경 힛타이트인의 칩입으로 멸망하면서 고바빌로니아왕조는 바빌론 제1왕조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반응형
Posted by JH안소니至山
반응형

 

 

 

 

●메소포타미아 새로운 주류 바빌로니아 

 

 

 

 

 

 

 

 

 

 

 

아카드인은 아카드 지방의 북부에 선사 시대부터 거주하였으며 BC 3000년경 최초의 키시(Kish) 왕조를 세우면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처음으로 등장한다.아카드(Akkad)는 고대 오리엔트에서 활약한 민족 또는 그들이 살던 지방의 이름이다.이들은 수메르 북부지방에 이주 정착하여 살던 셈족 계통의 한 민족으로 사르곤(Sargon) 왕은 BC 2300 년경 부터 위대한 정복자로 알려져 왔다.사르곤 왕은 수메르의 루갈작게시왕을 패배시키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그리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하나의 통일 제국을 건설하였다.그러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속에서도 도시국가의 기본적 형태는 유지되었다.아카드 제국의 전성기는 사르곤왕의 손자 나랍신왕 때였다.그의 시대에 아카드 제국의 영토는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였다.그러나 수메르인들의 저항은 끈질기고 강했다.아카드 제국은 나날이 쇠약해져 가던 중 북동 산맥 지역에서 온 구티족의 칩입에 의해 약 200 년 만에 붕괴되고 이후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은 약 100년간 야만적인 구티족의 지배를 받게된다.이러한 구티족의 지배에서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을 해방시킨 것은 도시국가 우르의 지배자 우르헤갈이었다.우르헤갈의 치세는 불과 7년만에 그치고 우루남무가 구티족을 완전하게 몰아내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왕이 되면서 지구라트를 건축하고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의 기초를 삼았다.이 후 아들 슐기왕이 점차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조직된 행정조직과 표준적인 법전을 통하여 통일 제국을 잘 다스리면서 수메르인의 제2의 번영기를 맞이했다.수메르인은 세계최초로 문자를 만들고 도시국가 모델을 창조한 지혜로운 고대인이었다.건축에 있어서도 지구라트라는 새로운 건축양식을 만들었다.지구라트는 인공적으로 세워진 신전으로 그 형태는 상층부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다.이것은 신을 향한 수메르인의 종교적 열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중심부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어졌다.벽돌의 표면은 불에 구운 것으로 여러가지 그림과 모자이크로 장식되어졌다.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로 이 지구라트를 묘사한 것이다.수메르인들은 종교를 과학으로도 연결하였다.수메르의 신들은 각자 고유의 숫자를 갖고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천문학적.수학적 현상들에 대한 연구가 행해졌다.그래서 태음력이 만들어져 종교적 축제를 적합하게 조절하였다.산술의 기본 숫자는 60이었다.60은 수메르 최고의 신 안(An)의 고유 숫자이다.이렇게 고안한 60진법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시간이나 원의 각도를 나타내는데 쓰이고 있다.또한 수메르인들은 금이나 동으로 만드는 세공술에 매우  정교하였다.역사적 사건들을 양각하였다.특히 눈을 크게 뜨고 자연의 위대한 힘을 경외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입상을 매우 정교하게 양각하였다.그러나 BC 2,000 년경에 이르러 동쪽으로부터는 엘람인이 쳐들어오고 서쪽으로부터는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이 칩입하면서 수메르와 아카드의 통일제국 우르왕조는 무너지고 밀았다.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의 정치질서는 아모리인과 엘람인의 칩입으로 완전하게 파괴되어 갔다.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 세력은 몹시 쇠퇴되었다.반면에 유프라테스강가의 마리(Mary)나 티그리스강가의 아쉬르 같은 도시들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메소포타미아 세력의 중심은 북쪽으로 옮아갔다.

 

 

 

 

 

 

 

그리고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이 바빌론에 정착했을 당시에는 그 곳은 별로 중요한 지역은 아니였다.BC1800 년경에 아모리인 족장 수무아붐이 이웃 도시국가인 카잘루에게서 바빌론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을 넘겨받아 터를 잡았다. 수무아붐이 세운 왕조가 그 유명한 고바빌로니아 즉 바빌론 제1왕조이다. 하지만 수무아붐은 스스로를 바빌론의 왕이라는 칭호로 높여 부르지도 못했다. 칭왕하지도 못할 정도로 바빌론이 워낙 작은 마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모리인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 통일제국 우르왕조를 무너뜨리고 수메르와 아카드 문명을 흡수하여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바빌론이 화려한 강대국으로 떠오른 것은 고바빌로니아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왕 시절부터였다. 함무라비는 탁월한 외치와 내정 능력으로 작은 마을이었던 바빌론을 거대한 도시로 확장했다. 세수를 정비하는 한편 제대로 된 중앙집권제를 확립했고 엘람으로부터 독립을 이뤄냈으며 이신.라르사.키쉬.니푸르.우르 등 쟁쟁한 대도시들을 죄다 복속시켰다. 동쪽으로는 저 멀리 엘람까지 서쪽으로는 고아시리아를 정벌하면서 웬만한 지방들은 모조리 정복할 수 있었다. 함무라비는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혼란스러웠던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재통일했고 이때 이후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은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함무라비왕의 4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바빌론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발전했다.바빌로니아인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함무라비 법전이다.함무라비 법전은 높이 8피트의 딱딱한 돌기둥에 새겨져 공포되었다.이 법전은 거의 4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이 보다 앞서 수메르인.아카드인들도 성문 법률을 갖고 있었는데 함무라비왕은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세계 최초의 성문 법전을 편찬하였던 것이다.이 법전은 당시의 사회가 3개의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사제 및 세속 귀족들.일반시민계층인 상인 및 농민들.최하위계층인 노예들이었다.법조문은 각 계층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었으며 동일 계층 내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법앞에서 모두 평등하였다.고바빌로니아 왕조는 함무라비왕이 죽자 빠르게 무너졌다.메소포타미아 남부는 거대한 대평원 지대라 공격에 대단히 취약했다. 메소포타미아 최남단에는 시랜드 왕조가 들어서서 독립을 선포했지만 고바빌로니아 삼수일루나왕은 이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한때 함무라비왕이 억눌러 놨던 고아시리아는 바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고 고바빌로니아의 영향권은 수도 바빌론과 그 주변 일대로 쪼그라들었다.고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중부까지 쳐들어와 고바빌로니아의 영토를 갉아먹었다. 삼수일루나의 후계자였던 아비에슈흐왕은 시랜드 왕조를 다시 무릎 꿇리려고 시도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몰락한 바빌론에 만족한 채로 건물이나 개보수하는 것밖에 업적이 없었다. 결국 최후의 왕 삼수디타나왕이 BC 1550년경 인도유렵어족으로 오리엔트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히타이트인 무르실리 1세에게 대패하고 바빌론이 함락되면서 고바빌로니아는 함무라비 사후 150여 년 만에 허무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바빌론을 기반으로 한 첫 번째 왕조였던 고바빌로니아 즉 .바빌론 제1왕조가 몰락하자 그 자리는 잠시 시랜드 왕조가 메웠다. 이때문에 시랜드 왕조를 바빌론 제2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시랜드 왕조는 태생이 강하지 못해 얼마 못 가 동쪽의 자그로스산맥에서 발원한 민족이었던 카시트인들에게 밀려났다. 바빌론을 장악한 카시트인들이 세운 카시트왕조를 바빌론 제3왕조라고 부른다. 중바빌로니아라고도 불리는 카시트 왕조는 이전의 셈족계 아모리인이 세운 고바빌로니아나 훗날 들어설 셈족계 칼테아인의 신바빌로니아 비하면 인지도는 훨씬 덜하지만 사실 바빌론을 가장 오랫동안 지배한 왕조였다.무려 576년 동안이나 존속하면서 바빌론과 인근에 패권을 행사하였다.BC1450년경에는 남쪽으로 밀려갔던 시랜드 왕조의 목숨을 완전히 끝장내고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재통일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576년 동안이나 존속한 바빌론 제3왕조인 카시트왕조가 멸망하고 난 이후 제10왕조 셈족인 신바빌로니아가 들어서기 전까지 무려 6개에 달하는 왕조들이 바빌론에 들어섰다. 이 역시 모두 바빌로니아라고 부른다.하지만 대부분이 단명한 왕조인 데다가 알려진 기록도 거의 없는 탓에 별다른 주목은 받지 못한다.그러나 셈족계 칼데아인 장군 나보폴라사르가 BC 620년 바빌론에서 궐기하여 신아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바빌론을 중심으로 한 제국을 재창건하면서 고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대왕 이래 1,000년 만에 메소포타미아계 제국 중심의 정통 바빌론인 신바빌로니아 즉. 바빌론 제10왕조를 세우면서 제1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BC 605년에 승하하고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로2세가 신바빌로니아 즉. 비빌론 제 10왕조의 2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즉위하자마자 옛 아시리아 제국의 잔재들을 철저하게 지우는 데 공을 들였다.신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우발리트 2세가 재기하지 못하도록 끝장내는 한편 아시리아 북부의 잔군들을 처리했으며 이집트와도 전쟁을 벌여 이집트 세력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이어서 이집트 정복에 나서지만 정복에는 실패했다.그러나  중간에 걸리적 거리던 유대 왕국은 철저하게 짓밟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때 일어난 사건이 유명한 바빌론유수이다.당시로서는 촌구석에 해당하던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잡혀와 에테멘앙카와 거대한 지구라트들을 보고 경악해 바벨탑 이야기를 생각해냈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업적은 정복 사업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현 이란 지역의 메디아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어 메디아 공주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이후 고향을 잊지 못하는 아미티스 왕비를 위하여 세계7대불가사의로 알려진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지어 위엄을 과시했으며 에테멘앙카.이슈타르의 문.행진의 거리 등 수도 바빌론 전체를 전면 개보수했다. 왕은 바빌론에 가장 큰 신경을 많이 쏟았지만 바빌론뿐만 아니라 신바빌로니아 제국 내의 대다수 도시들에도 관심이 많았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재위기에 최소한 13개에 달하는 도시들이 완전한 리모델링을 걸쳐 아름다운 도시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이처럼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건축과 문화.영토 확장 등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당대의 바빌론은 세계 최대의 메트로폴리스 즉. 세계의 수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영광을 자랑할 수 있었다.명군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43년에 달하는 기나긴 치세가 끝나자 신바빌로니아는 조금씩 몰락하게 되었다. 신바빌로니아가 멸망하자 아케메네스왕조가 몇백 년 동안 바빌론을 다스렸고 이후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국가는 다시는 등장하지 못했다.

 

 

 

 

 

 

 

반응형
Posted by JH안소니至山
반응형

 

 

 

 

 

●수메르인의 문화유산

 

 

 

 

 

 

 

 

 

 

수메르인은 세계최초로 문자를 만들고 도시국가 모델을 창조한 지혜로운 고대인이었다.소리를 내자자마자 곧 없어지는 말을 영원히 보존하는 기록법으로 당시에는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 점토판에 갈대로 만든 펜을 사용하여 문자를 썼다.처음에는 상형문자를 사용했다.그러나 상형문자는 표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표현할 수 있는 대상도 제한적이었다.그래서 새롭게 창안한 것이 쐐기문자이다.이것이 바로 설형문자이다.점토판을 불에구어 마르면 단단해지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오늘날 학자들은 점토판에 기록된 문자를 해독하거나 연구함으로써 수메르의 역사를 조금씩 밝히고 있다.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수메르인은 건축에 있어서도 지구라트라는 새로운 건축양식을 만들었다.지구라트는 인공적으로 세워진 신전으로 그 형태는 상층부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다.이것은 신을 향한 수메르인의 종교적 열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중심부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어졌다.벽돌의 표면은 불에 구운 것으로 여러가지 그림과 모자이크로 장식되어졌다.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로 이 지구라트를 묘사한 것이다.수메르인들은 종교를 과학으로도 연결하였다.수메르의 신들은 각자 고유의 숫자를 갖고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천문학적.수학적 현상들에 대한 연구가 행해졌다.그래서 태음력이 만들어져 종교적 축제를 적합하게 조절하였다.산술의 기본 숫자는 60이었다.60은 수메르 최고의 신 안(An)의 고유 숫자이다.이렇게 고안한 60진법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시간이나 원의 각도를 나타내는데 쓰이고 있다.또한 수메르인들은 금이나 동으로 만드는 세공술에 매우  정교하였다.역사적 사건들을 양각하였다.특히 눈을 크게 뜨고 자연의 위대한 힘을 경외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입상을 매우 정교하게 양각하였다.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정착한지 수백년이 지났을 때에 끔찍한 대홍수의 기습이 발생하였다.엄청나게 퍼부어대기 시작한 폭풍우는 한순간에 대홍수가 되어 성역을 단숨에 휩쓸어 버렸다.7일간의 대홍수는 온 나라를 쓸어내리며 초토화 시켰다.이 홍수의 전설은 니푸르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었다.1930년경 영국의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 경은 수메르 우르 유적지의 신전 조사가 끝나고 별 생각 없이 근처에 사방 2미터 넓이의 깊은 구멍을 파보았다.이미 파헤친 신전의 유적보다 훨씬 아래쪽에 두께가 3미터나 되는 점토층이 발견되었으며 그 밑에는 또 다른 주거지가 있었다.울리 경은 이 점토층을 기원전 3500년 경에 일어난 대홍수의 자취라고 추정하였다. 또 다른 유적지에서는 기원전 2500년 경에 일어난 대홍수로 퇴적된 두께 60센티미터의 점토층이 발견되었다.수메르인은 이러한 대홍수의 피해를 여러번에 걸쳐 피해를 극복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면서 신전을 중심으로 거대한 성벽을 둘러싸고 그 바깥에는 도시를 에어싼 성벽을 축성하는 기술을 습득하였던 것이다.

 

 

 

 

 

 

 

 

 

 

 

 

 

 

 

수메르인의 밭은 하루 만에 돌아올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시의 성벽 바깥에 펼쳐져 있었다.신전의 직영지와 도시 주민에게 활당된 소작지로 되어 있었다.여름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물을 운하나 저수지를 이용해 물을  끌어들여 보리와 밀을 재배하였다.따라서 관개농업이 무척 발달하였다.그 생산성이 무척 높았다.남겨진 기록을 보면 기원전 1700 년경 바빌로니아왕국시대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뿌린 씨앗의 100배에서 200배 까지 되는 수확량을 올렸다고 적혀 있다.수메르인보다 2000년 이나 뒤에 등장하는 고대 로마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시실리아섬에서도 뿌린 씨앗의 8배밖에 거두지 못했으며 중세의 영국은 3배에서5배 였다고 한다.수메르와 로마는 서로 같은 건조자대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수확량이 다른 이유는 무앗일까?우선 씨앗을 뿌리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다.로마에서는 사람의 손으로 씨앗을 뿌라는 반면에 수메르에서는 파종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씨앗이 골고루 뿌려진다.두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갈때 쟁기 위에 부착한 씨뿌리는 기구로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밭이랑의 간격이 50센티에서 55센티로 넒은 편이어서 씨앗의 양이 적게 들었다.1핵타르당 수확량의 차이도 크게 생겼다.이 의문도 니프로 유적에서 발견돤 점토판 문서에서 풀렸다.이것은 기원전 1700 년경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한 농민의 달력으로 1년 동안의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밭을 갈 때에는 물이 밭에 넘치지 않도록 관개와 용수로에 주의하라.보리 싹이 돋아나면 여신 닝키림에게 제사지내고 보리 싹 주변에 새들을 쫓아라.보리가 자라서 밭의 좁은 바닥을 가득 채우면 비로서 물을 주라.보리가 배의 돛대처럼 크게 자라면 두번째 물을 주라.만약 물을 준 보리가 붉은 색으로 변하면 보리가 사마니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알맹이가 꽉 찬 보리로 자라면 세번째 물을 주라.이런 식으로 농사를 지으면 작년보다 10분의 1은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이 방법은 현재 이라크 농법과 거의 다르지 않게 전수되었다.로마의 경우는 천수농업이고 수메르의 농업은 관개농업이다.밭에 물을 대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당시의 수메르인들은 터득하고 있었다.강물 속에는다양한 영양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수메르인은 해마다 물을 줌으로서 밭에 영양분을 공급한 것이었다.수메르인의 농업생산성을 보증하는 운하의 건설과 수리는 왕의 중요한 임무였다.건설된 운하는 밭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이 될 뿐만 아니라 홍수의 위험을 예방하고 뱃길도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구리와 주석을 합금해서 만든 청동기를 사용하여 호미.써레.갈퀴.망치.땅을 파는 쟁기와 곡식을 베는 낫을 발명하여 농업생산량을 늘렸다.운송과 교역을 중요시했던 수메르는  바퀴를 이용하여  활용한 다양한 발명품들을 상용화했다.소가 끄는 썰매는 기원전 3000 년경 고대도시 우르에서 왕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운반용으로 사용되었다.또한 당나귀가 이끄는 전차를 만들어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철저한 연구 끝에 구현된 전차는 오직 전투를 위해 중무장한 병기였다.바퀴를 사용한 전차나 수례는 수메르 왕실묘자에서 발견된 군기에서 확인되었다.수메르의 도시 국가들은 영토.천연자원.그리고 물을 위해 전쟁을 수시로 할 수 밖에  없었다.메소포타미아 남부자역은 대평원 지역이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칩입이 많아 성을 축성하는 기술.적을 막는 병기.전차등이 강성해야만 했다.수메르의 이러한 잦은 전쟁은 점차적으로 네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로 개조되었다.수메르인의 정치세력은 바빌로니아에 의해 소멸되었지만 그들이 자자손손 살아온 터전인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서 다른 지배족속이 이끄는 사회체제속에 동화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수메르인들만의 고유한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면서 그들만의 역사를 보존하고 삶을 이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메소포타미아남부 수메르 자역에 해당하는 현재 이라크 남부의 토착  민족인 습지아랍인이 일정부분 수메르의 후예일 것으로 추정된다.사회 구조는 베두인에 가깝긴 해도 고대 수메르 문화의 갈대 집과 선박을 지금도 만들어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쿠르드족은 자신들이 수메르의 직계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쿠르드족의 근원이 고대 수메르어 guti 라든가 그 조상들이 수메르 지역에 뿌리내렸다는 기록이 발견되고 일부 어휘들이 수메르어와 겹치기 때문이다.

 

 

 

 

 

 

 

 

 

반응형
Posted by JH안소니至山
반응형

 

 

 

●수메르인의 문학작품

 

 

 

 

 

 

 

 

 

 

수메르인에게는 풍부한 문학적 감성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가득했다.수메르인의 홍수신화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와 비슷하다.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기원전 586년에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이 당시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하던 바빌로니아에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할 때 그 곳에서 들은 수메르 홍수의 전설을 듣고 기억하였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기원전 400년 경에  <창세기>을 최종 편집하면서  <노아의 홍수>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수메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정착을 한 후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매년 마다 불규칙적으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범람하는 것이였다.따라서 홍수는 신이 노하여 그들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따라서 장구한 세월을 통해 홍수에 시달린 수메르인들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홍수의 전설이 생겨나게 되었다.신들은 자신들이 창조한 인간들이 신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자 회의를 하여 대홍수를 통하여 모든 인간을 없애기로 하였다.그러자 이 가혹한 처사에 불만을 품은 신이 몰래 인간들에게  신들의 결정을 알려주어 인류의 멸망을 구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그 신이 선택한 인간은 바로 왕이자 사제였던 지우스드라였다.그 신은 신들의 결정사항을 알려주며 재물을 아끼지말고 배를 만들어 가족과 모든 생물의 종자를 싣고 7일간 계속되는 홍수를 이겨내고 살아남으라는 말을 전했다.신의 말대로 배를 만들고 준비를 마치자 대홍수는 시작되었다.지우스드라는 여섯날을 홍수와 폭풍우속에서 보내고 7일째가 되자 폭풍우는 멎었다.지우스드라는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 뒤에 배가 머무를 곳을 찾아 나섰다.배는 흘러 흘러 산꼭대기에 닿았다.지우스드라는 물이 빠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우선 비둘기를 날려보냈다.그러나 비둘기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다음에는 제비를 날려보냈지만 다시 돌아왔다.마지막으로 큰 까마귀를 날려보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물이 다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지우스드라는 가족과 함께 배에서 나와 산꼭대기에서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이상은 수메르인이 기록으로 남긴 홍수 신화이다.이것은수메르인들이 홍수에 시달리면서 살아온 삶속에서 생존했던 지난날을 기리면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신에게 감사하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라는 교훈을 후손들에 남겨주기 위한 이야기를 신화로 만든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렇듯이 수메르인들의 문학작품에는 주로 신화를 토대로 한 것이였다.이런 작품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우르왕조의 우르크시 왕이었던 길가메쉬에 관한 것이다.먼 옛날 유프라테스강가에 있던 우루크시에는 길가메쉬라는 용맹한 왕이 있었다.그는 전쟁을 잘하였으나 백성들을 억압하고 괴롭혔다.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참다 못해 신들에게 기도를 올렸다."신들이여!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시어 저 폭악한 길가메쉬왕을  심판하여 주십시요!"이렇게 간절하게 백성들의 기도를 들은 신들은 회의를 열어 길가메쉬보다 더 강하고 용감한 인간을 만들어 오만한 길가메쉬의 버릇을 고치도록 결정하였다.신들은 점토로 엔키두라는 인간을 만들어 야수들이 사는 숲에 보내어 자라게 했다.엔키두는 야수와 함께 지내면서 강하고 용감하게 성장했다.이런 소식을 들은 길가메쉬왕은 한 가지 꾀를 내었다."엔키두는 야수들과 같이 자랐으니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게 얼마나 좋은지 모를거다.그 놈이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 제가 할일이 무엇인지 잊고 말거야"하면서 부하에게 명령하여 한 절세의 미녀를 엔키두가 사는 숲 근처로 보내도록 하였다.그 미녀는 며칠을 기다리다가 엔키두를 만났다."엔키두님! 제가 예쁘지 않으세요?제가 마음에 드시면 사랑해주세요"그러자 짐승이나 다름없는 엔키두는 난생 처음보는 미녀의 유혹에 빠져버렸다.엔키두는 몇 달 동안 미녀와 사랑을 나누며 세월을 보냈다.그러자 천상의 신들은 이 사실을 알고 엔키두가 제 정신을 차리도록 하였다.정신을 번쩍 차린 엔키두는 미녀를 떨치고 일어나 길가메쉬를 혼내주려고 우르크시로 향했다.엔키두가 우르크시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마침 신전에 제사를 드리려가는 길가메쉬욍의 행렬이 신전 앞에서 멈추자 왕이걸어나왔다.엔키두는 왕의 앞으로나와 가는길을 막아서며 "길가메쉬여!그대는 백성을 너무 괴롭혔오.이제 내가 신들을 대신하여 그대를 벌 줄 것이니 나의 도전를 받으시오"그러자 길가메쉬왕도 쾌이 승낙하고 대결을 시작했다.두 용사의 대결은 쉽사리 우열이 가려지지 않았다.막상막하였다.길가메쉬는 점차 엔키두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엔키두여!우리가 이렇게 싸울 필요가 어디에 있나.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네.내가 마음을 고쳐먹을 테니 우리 서로 친구가 되세"그러자 엔키두 역시 대결을 하는 동안 그의 용감한 것에 감탄하고 " 좋아! 나도 자네가 마음에 들었다네." 그 후로 두 영웅은 서로 힘을 합하여 갖가지 모험을 하게 되었다.그 들의 모험은 더욱 과감해져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특히 여신 이슈탈의 황소를 죽인 사건은 신들의 노여움을 크게 사게 되어 엔키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길가메쉬는 엔키두가 죽자 인생의 무상함에 깊은 회의를 느켰다.그는 얼마 후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찾아 길을 떠났다.그는 갖은 고생 끝에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알고 있는 슈롯파크라는 마을에 사는 우트나피슈틴이라는 노인을 만나게 된다.그에 끈질기게 비밀을 알려달라고 간청하지만 노인은 거절하였다.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간곡하게 간청을 계속하자 노인은 고집을 꺾고 생명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우트나피슈틴 노인은 자신이 겪었던 홍수이야기를 길가메쉬에게 들려주며 불사의 약초가 있는 곳을 가르켜주었다.노인이 가르켜준 곳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간신히 약초를 구한 뒤 기쁨에 넘쳐 우르크시로 향했다.우르크시 근처에서 해는 이미 저물어 하룻밤을 저물고자 주의를 살피다가 샘물을 발견하였다 .이 곳에서 하루밤 지내고 가려고 생각했다.길가메쉬는 우선 목욕을 하려고 옷을 벗어 불사의 약초와 함께 물가에 놓아둔 채 샘물 속으로 들어 갔다.그때 마침 뱀 한마라가 약초의 냄새를 맡더니 그것을 먹으려고 달려 들었다.그것을 본 길가메쉬는 물 속에서 뛰쳐 나왔으나 뱀은 이미 약초를 먹어치운 후였다."아! 이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란 말인가?"길가메쉬는 엔키두가 죽었을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인간의 숙명을 한탄하며 우르크시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불멸의 영생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줄거움을 찾으면서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길가메쉬의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서 그 내용은 오늘날에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반응형
Posted by JH안소니至山
반응형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도시국가

 

 

 

 

 

 

 

 

 

 

 

 

 

 

 

 

메소포타미아는 수메르인의 문명이 토대가 되었고 아카드·아무르인들의 문명이 가미되었다. 화폐는 쓰이지 않아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B.C 2700 년경에  수메르의 정치사회구조는 귀족. 평민.노예로 구성되었다. 왕.왕족. 고위 관료.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귀족들은 정치권력과 거대한 토지를 소유했고 높은 신분을 유지했다. 한편 평민들은 토지의 소유나 처분이 가능했고 신분을 살 수 있었고 전쟁포로나 외지인. 범죄자 그리고 채무자들 거의 대부분은 노예였다. 또한 채무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은 3년 후에 일반인으로 복귀가 가능했다.노예는 주인에게 계속 복종해야했다.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의한 비옥한 퇴적평야로서 수메르인은 역사의 시초에 이미 남부에 정주하여 각지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수메르인의 왕은 주신(主神)의 하나인 엔릴의 아들이라 칭하여 신으로서 숭배받았다.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종교는 현세적 다신교로서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성술도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로서 발전하였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불규칙적이고 잦은 범람은 참혹한 재앙을 가져왔고 개방적인 지형은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을 불렀다.이러한 자연 환경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자연의 이득보다는 재앙을 극복하는데 힘써야 했던 수메르인들은 삶도 지극히 현세적인 삶을 꾸려 나갔고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희망을 갖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도 암울하고 비관주의적인 특징이 강하였다. 그들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생각과 현세적인 가치관은 길가메시 서사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근년에 와서 고대사에 관한 많은 새로운 지식이 더해짐에 따라 인류의 가장 오랜 문명을 쌓아올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이미 BC 3,500 년경에 놀랄 만한 고도의 기술이나 물질문명이 결실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미술·종교 면에 있어서도 그 소박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의 깊은 이해를 나타내는 걸작 또는 제신(諸神)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갖가지 유품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수메르 초기도시는 하천 유역을 따라 발달하였으며 우르.우르크.우바이드.움마.라가시와 같은 도시국가들이 이 시대의 중심지 역할를 했다.이들은 각각 독립된 도시국가로 운영되고 자신들의 신전과 신이 있었다.이러한 도시국가들은 인류 최초의 정주생활을 정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정치 체제와 사회구조의 발달로 이어지면서 도시국가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다.수메르의 도시국가들 중에는 화려한 번영을 누려 남부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광범위하게 정복한 경우가 많았다.움마라는 도시국가는 루갈작게시왕이 지중해까지 이르는 세력을 펼치기도 하는 융성을 누렸지만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는 북방으로부터 밀려 들어온 아카드 칩입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수메르 문명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가치는 바로 문자발명이었다. 기원전 3,400 년경 세계최초의 문자 체계인 쐐기 문자를 만들었다.처음에는 단순한 기록용 기호로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다양한 용도로 발전하게 되었다.점토판위에 새겨져 세금.거래.법률 등 행정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으나 이후 지식과 정보의 축적이 가능하게 했고 역사를 기록하는 기점을 마련했다.수메르인들은 문자를 통해 서사시와 같은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길가메시 서사사이다.인류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서 그 내용은 오늘날에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이러한 문자 체계는 이후 아카드와 바빌로니아 같은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문명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이 지역 전반에서 사용돠었다 특히 페니키아인은 수메르 쐐기문자를 간단하게 하여 알파벳을 만들었는데 이 페니키아 문자가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되었다.

 

 

 

 

 

 

 

 

수메르인의 문명은 법과 질서가 확립된 조직사회였다.자신들의 도시국가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법을 제정했다.인류 역사상 가장 초기의 법체계 중 하나로 왕들이 이 법을 통해 도시를 다스리며 정의와 공정을 구현하려고 했다.수메르 왕 우르남무는  이민족인 구티족을 완전하게 몰아내고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의 통합제국을 만들고 수메르의 제2 전성기를 열면서 세계 최초의 성문화된 법전을 만들었다.범죄에 대한 처벌.계약.재산권에 대한 규정을  명시하고 이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이러한 법 체계는 이후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법전들의 기초가 되었다.특히 우르남무는 대규모 지구라트를 건설하여 위엄을 보였다.지구라트는 도시국가의 중심에 여러 층으로 쌓아올린 탑 모양의 신전을 말하는 것으로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로 이 지구라트에 관한 것이다.우르남무왕의 우르왕조도 기원전 2,000 년경에 이르러 동쪽으로부터는 엘람인이 칩입해 들어오고 서쪽으로부터는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이  칩입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이후에 수메르인들은 정치적 세력으로서는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그 문화는 후세에 전해져 내려왔고 수메르어는 중세의 라틴어와 함께 문학어와 종교어로서 이후 2,000년 이나 계속하여 사용되었다.수메르 문명은 단순한 고대 문명의 하나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었다.수메르인들의 도시국가체계.쐐기문자.법 제도는 오늘날 현대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우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문학적 전통에서 휴머니즘을 이어받고 창의력과 지혜는 인류 역사에 깊은 공헌을 남겼다.메소포타미아의 유산은 오늘날 우리곁에 남아 여전히 숨쉬고 있다.

 

 

 

 

 

 

 

 

반응형
Posted by JH안소니至山
반응형

 

 

 

 

 

●최초문명의 발생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문명

 

 

 

 

 

 

 

 

 

 

 

 

 

인류는 신석기 농업혁명의 융성을 바탕으로 기원전 3,500 년경을 전후하여 청동기사용.도시의 발생.신분과 계층의 발생.국가의 출현.종교의 태동.문자의 사용 등으로 문명사회로 진입하였다.큰 강을 이용한 관개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생산이 증대하고 인구도 번창하였다.작은 촌락의 모습에서 점차적으로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규모가 커지면서 서로 협동하고 통합되면서 사회의 조직과 제도가 정비되고 마침내 도시가 성립되어 도시들을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었다.그 중에서 가장 먼저 문명 단계에 들어선 것은 기원전 3,500 년경에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었다.나일강 하구와 메소포타미아 이 두 지역 사이에 펼쳐져 있는 동부 지중해 연안의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최초의 도시가 나타났고최초의 문명이 태동되었다.오늘날 중동지방의 두 지역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인류가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여 농경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발전시켜나갔다.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서쪽으로 지중해와 맞닿고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막과 접하며 북으로는 타우르스산맥. 그리고  동쪽으로는 자그르스산맥을 경계로 하는 지역이다.이 지역 내에서도 지중해 연안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은 대단히 비옥하였다.이 지역을 "강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렀다.이러한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지역에 가장 일찌기 들어온 민족은 수메르인이었다.수메르인들은 이 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타나게 될 여러 문명들의 기반이 되는 문명을 만들어 냈다.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끊임없는 이주와 칩입의 연속이었다.새로운 민족이 이주해 이전의 문명을 파괴하는 듯 했지만 나중에는 우수한 수메르 문명의 핵심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 자신들의 새로운 문명을 결합하여 보다 더 나은 문명으로 발전하였다.수메르인들은 당시에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이때의 문자는 상형문자이었다.이 문자는 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있는 대상도 한정돠어 있어 문명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였다.따라서 수메르인들은 쐐기 모양의 표식으로 글자를 나타낸 설형문자를 만들어 냈다.많은 전설과 영웅들의 일화 등을 영구히 기록하기 위해 갈대 줄기를 펜으로 삼아 점토판 위에 설형문자를 적고 불에 구워 보존하였다.이를 다시 페니키아인들이 설형문자를 간단하게 하여 알파벳을 만들었는데 이 페니키아 문자가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되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강은  범람 시기가 매우 불규칙하여 예측하기가 어렵고 범람 규모도 다양하였다.범람 후에는 토양이 늪지대로 변했는데 이러한 땅을 적절히 이용하려면 배수를 잘해야만 했다.또한 여름에는 가뭄으로 몹시 메말라기 때문에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충분한 관개시설이 필요했다.수메르인들은 수로와 저수지를 만들어 범람하는 강물을 잘 다스려 농업을 발전시켰다.농경산업이 발달하면서 인구가 증가하였다.수메르인들의 도시는 규모가 카지고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문화와 기술을 발전시켰다.바퀴를 만들어 운송수단의 혁신을 가져왔고 야생당나귀가 끄는 전차를  전쟁시에 이용하였다.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청동을 만들면서 청동기문화의 혁신을 가져왔다.태음력을 사용하고 60진법에 의한 계산법도 창안하였다.천체의 운행을 보고 점성술과 천문학이 발달하였다.메소포타미아의 예측할 수 없는 기후는 수메르인들에게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오게 했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자연에 대한 숭배 현상이 유행하고 이것이 종교 의식으로 태동되었다.각 도시국가들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었으며 시민 집회는 신들의 모임을 모방하였다.이러한 종교관은 특정한 지배 계급으로 등장한 사제들의 지배권을 합리화시켜 주었다.도시국가의 모든 토지는 신의 소유이고 사제는 신과 인간 사이의 중계자이므로 사제들이 모든 토지를 관리할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대 부분의 수메르인에게는 받아들여졌다.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에서는 농경.교역.전쟁 등에 관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는데 종교지도자들의 발언권이 강해지게 되었다.수메르의 주요 도시국가들에서는 기원전 2700 년경에 이르러 세습적인 왕권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기원  역시 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수메르 도시국가들 중에는 화려한 번영을 누려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광범위하게 정복한 경우가 많았다.그러나 결국 수메르인의 국가는 북방의 악카드의 칩입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이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아카드.바빌로니아 등이 지배하면서 수메르의 정치적세력은 소멸하게된다.그러나 수메르인들이 이루어 놓은 문화와 언어.제도와 기술은 그대로 전수되어 새로운 세력의 문화에 기반이 되었다.

 

 

 

 

 

 

 

 

 

반응형
Posted by JH안소니至山
반응형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는 지성인이라는 뜻으로 동물학상 오늘날 우리와 같은  가장 가까운 인류를 가리키는 학술상의 용어이다.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전에서 1만년 전으로 문화적인 진화를 시작하였다.호모사피엔스가 나타나기 이전 인류는 2백만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에 결쳐 생태학적인 진화를 거쳐야 했다.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인류의 근원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약 2백만년전에 지구상에 나타났다.돌조각을 깨서 연장으로 삼아 사냥을 한 최초의 인류이지만 동물에 가깝다.이들은 직립해서 걷긴 했으나 두뇌가 원숭이 것과 거의 비슷했고 키도 1미터 30센티 정도에 불과했다.그후 100만년 전에서 50만년 전에 이르러 오늘날 인간의 모습과 비슷한 직립인간 호모에레투스(Homo Eretus)가 나타났다.호모에레투스 화석은 북경에서 발견되었다.이들은 돌을 갈아서 손도끼로 사용하고 불을 사용하였다.호모에레투스 후예는 네안테르탈인이었다.두뇌의 크키는 호모사피엔스 크기와 비슷했지만 두개골 모습이 원숭이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그래도 이들은 죽은자를 매장하는 관습을 갖게되고 정신적으로도 호모시피엔스에 훨씬 기까워졌다.네안테르탈인 화석은 19세기 독일에서 발견되었다.이후 약 2만년전에 비로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나타났다.이들의 화석은 프랑스 크로마뇽 동굴에서 발견되었다.오늘날 우리 인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머리와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두뇌의 크기.치아.척추 등도 다르지 않았다.이렇게 오늘날 우리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가 되기까지는 2백만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이에 비하면  이후 인간의 문화는 빛의 속도로 2만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에 다양한 경험과 풍부한 상상력을 통하여 오늘날의 풍족한 삶을 창조해냈다.2만년 전에 인간은 겨우 사냥이나 식물채집 정도로 삶을 영위했다.그러나 약 1만년 전부터는 한 곳에 정착을 하고 동물을 가축하면 식물을 재배하게 되었다.바로 이때부터 인류의 문명은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이른바 신석기 농업혁명시대로 큰 변혁의 시대를 가져오게 됨으로서 움집을 짓고 촌락을 이루면서 농경문화로 인한 생산력의 발달로 식량이 풍부해지고 인구도 증가하게 되었다.식량을 저장하고 음식을 담기위한  토기가 만들어졌으며 북과 베틀이 발명되고 옷감을 만들어 추위로부터 보호하는 생활문화가 정착되었다.이때의 농경문화는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자연적인 기후현상에만 의존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토지의 양분이 고갈되어 생산력이 저하됨을 알았다.따라서 정착되어온 땅을 버리고 새로운 촌락을 찾아 옮기는 이주형태의 아주 작은 촌락형태의 생활이었다.이러한 형태는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도.중국.유렵 의 초기사회에서 발견되고 있다.

 

 

 

 

 

 

 

 

반응형
Posted by JH안소니至山
이전버튼 1 이전버튼


Yesterday
Today
Total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태그목록

공지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