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10. 23:28 세계사속으로2
11.한반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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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

일반적으로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건국 연도는 기원전 2333년(요임금25년)년 경으로 이는 서거정의 "동국통감"에에 따른 것이다.이는 중국의 요임금 즉위년을 기준으로 본 것이다.요임금은 삼황오제 전설에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이다.단군왕검도 신화적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하느님이신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목적으로 바람.비.구름을 각각 주관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곡식.생명. 형벌 등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 가지를 주관하며 사람들을 다스렸다. 그러던 중에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환웅은 곰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 그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단군이다. 단군 왕검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다.” 이 신화는 당시의 지배자를 신격화하기 위한 것이였다. 이후에도 한반도 부족국가의 건국에는 어김없이 신화가 태동하였다.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 사실은 우리 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말해 준다. 또,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 사실과 홍익 인간의 건국 이념은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기원전 1200년 경에서 1000년 경을 전후하여 요령 지방과 한반도 일대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형동검. 반달 돌칼 등이 만들어졌으며 농업 생산력도 높아졌다.만주에서는 이보다 앞서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처음으로 금속을 사용하였으며 그들이 사용한 토기도 보다 단단해졌다.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동검과 청동 거울이 있다. 동검은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발전하였다. 비파형 동검은 요령 지방과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세형 동검은 한반도의 각 지역에서 고르게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있다. 선돌과 함께 청동기 시대 유적의 특징을 보여 주는 고인돌은 한반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보다 발전된 무덤인 돌널무덤은 만주와 한반도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무덤에서는 비파형 동검을 비롯하여 많은 청동기와 민무늬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군장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정치적 사회는 요령 지방과 한반도의 북부에서 먼저 나타났는데 이들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문화가 앞선 곳이었다. 초기에는 읍락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사회를 이끌어 간 지배자는 자신이 하늘의 아들이라 하면서 정치와 종교를 아울러 지배하였다. 그리고 점차 복잡해져 가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도 만들었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나라가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의 단군 왕검은 종교와 정치를 함께 지배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고조선의 흔적이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연나라와 접하기 시작한 기원전 300년 경의 기록이다.서한말 유향이 정리한 "전국책"에서 유세객 소진이 연나라 주변의 국가들을 열거하는데 여기서 고조선이 등장한다.이 무렵 연나라 쾌왕 때의 "차지의 난"의 여파로 제나라에 크게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는데 이를 틈타 조선도 대부 등의 관직을 두고 왕을 칭하는 등 연나라와 맞섰다.특히 왕이라는 칭호는 본래 주나라 천자의 칭호로 전국시대 당시에 참칭하는 왕조가 늘어났기는 했으나 여전히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는 칭호였다는 점에서 당시의 고조선의 국력이 커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이 당시 고조선은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600년 경부터 기원전 500년 경에 이르는 기간동안에 랴오닝성과 지린성 일부 지역의 부족국가들을 복속시키며 통일 국가를 넓혀 가고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영역까지 복속시키며 기원전 323년 칭왕을 할 무렵에는 랴오닝성 전역 및 지린성 일부지역과 평안도 .황해도 일대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와 국력을 지니게 돠었다.그러나 연나라와 전쟁에서 패한후 조선의 서방 쪽 패수의 땅 2,000여 리를 잃었다.조선이 연나라에게 패퇴한 뒤 반 세기 정도가 지난 뒤에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그 크기만으로도 압박이었을 중국의 통일 국가는 요동에 무언의 군사적 압력을 가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은 이에 스스로 복속하는 길을 택했다.두 나라 사이에는 안전이 보장된 근거인 공지(空地) 패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진나라에서는 오히려 부자 세습이 이루어지는 등 혼란한 시기가 지속되자 조선이 힘을 비축해 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진한교체기로 중원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조선이 증흥에성공했다. 이 시기 고조선은 공백이 생긴 서북쪽의 패수까지 다시 영토를 회복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연 · 제 등의 유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워나가며 위상을 높여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 고조 시기에 연왕 노관의 반란을 틈타 조선에 망명해온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중국 유망민 세력을 결집했다. 위만은 연의 고조선 침공 때 복속된 고조선계의 연나라 사람으로 보고 있다.위만이 유망민 세력을 결집한 데는 조선이 대륙의 혼란기에 획득한 옛 공지(空地)에 위만을 책봉하고 중국 유망민을 배치하여 결과적으로 신흥 세력의 결집이 쉬웠던 것이 작용했던 듯하다. 위만은 한나라가 쳐들어온다는 거짓말로 준왕을 속인 후 정변을 일으켜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수도를 왕검성으로 국호를 위만조선으로 정했다. 위만은 고조선 중심 계층의 입장에서는 외래인이었기에 위만조선 시기 고조선이라는 국가의 운영은 중국계 유이민을 포함한 위만 세력과 토착 세력인 상(相) 세력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위만조선 정권 내부에 문제가 있을 때는 상(相) 세력이 자신들의 산하 세력을 온존하면서 위만조선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때문에 위만조선 단계까지도 고조선에서는 군현제와 같은 직접 통치에 입각해 제어한 지역은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다. 위만조선은 그것을 대외무역으로부터 찾았다.위만은 즉위 직후 전한과 외신(外臣)의 약조(約)를 맺고 중국으로부터 철제 농기구 및 무기. 가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적인 유물은 나오지 않아 철기가 아주 널리 쓰이거나 직접 제작되지는 못한 듯하다. 당시 한나라의 집권자였던 여후시대는 흉노족에게 시달려 외부 확장을 자제하는 분위기였으므로 위만조선은 안전을 보장받고 우호관계를 맺었다.이러한 한나라 방면의 안정과 선진문화의 전수를 바탕으로 위만조선은 진번.임둔까지 주변 소국들을 정복했고 손자 대인 우거왕 때에는 진한 마한 변한 등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이 한나라에 입조하는 것을 막고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동북아의 패자로 떠오른 한 무제 유철이 제위에 오르면서 한나라의 주변국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강요되기 시작했다. 흉노 제국에 대한 대규모 원정으로 시작하여 남월이 원정 대상이 되었고 조선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한무제가 조선 원정을 밀어붙인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이 흉노를 견제한다는 명분에서였다.한나라와의 전쟁의 계기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 대해 불만을 제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섭하가 교섭에 실패하자 조선의 비왕(裨王)을 살해하고 도망간 사건이었다. 그런데 한나라는 처벌은 커녕 도리어 섭하를 요동 도위에 부임시켜 공을 치하했다. 이는 조선과의 전쟁을 유인하는 미끼 작전이었다.고조선이 군사를 파견해 섭하를 살해하면서 전한과 고조선 사이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수군과 육군의 양동 작전이 이루어졌으나 수군이 지지부진했고 고조선은 장기 항전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지연되자 한군의 장군 측에서 평화 관계를 제안해왔으나 한나라가 고조선의 태자에게 호위 무장 없이 국경선인 패수를 넘으라고 요구한 것을 고조선이 거부하여 전쟁이 다시 시작하였다.이후 고조선은 1년간의 항전에 나섰으나 장기화된 전쟁으로 조선의 상(相) 세력이 이반하여 우거왕이 시해되었다. 이후 성기에 의해 항전 세력이 수습되었으나 끝내 한군에 의해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은 멸망했다.고조선의 멸망 이후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설치되었다.이후에 산하에 존재했을 읍락국가들이 대두되면서 한국사는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조선 후기부터 기원전 108년 멸망기까지 많은 고조선 유이민이 남하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쪽의 삼한에서는 전기부터 고조선계 예맥인들이 다수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특히 "삼국사기" 에는 고조선 유민들이 신라 건국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고조선은 존재하던 중에 세 차례의 큰 위기가 있었는데 일단 전국 시대 연나라의 진격 와중에 연나라를 피해 한반도 남부로 피했던 부류들은 알려진 것만 따지자면 오늘날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 일대 .전라도 동부일대.경주 일대다.위만이 준왕을 몰아냈을 때에는 전북 서부 일대로 주로 갔고 물론 경주에도 갔다.당연히 이 지역들 말고 다른 곳에 정착했을 개연성은 높다. 한사군 설치 당시에는 오늘날 전남 남서부 일대와 경주로 갔다. 한사군 설치 이후에도 꾸준히 낙랑.대방의 조선 유민들은 중원측 지배자와 의견이 맞지 않거나 다른 기회가 포착되면 한반도 곳곳으로 남하했고 그런 흐름에서 건국된 게 바로 목지국.사로국.금관가야 등이다.한편으로는 남하하지 않은 고조선 유이민들은 부여로 흡수된 사실이 없다. 고조선은 최전성기에도 부여와 국경이 맞닿았던 적은 없으며 남하하지 않은 부류는 그냥 전국시대 연나라.서진의 지배 아래 살았다 .연나라가 고조선을 요동에서 밀어낼 때 미처 정복하지 못했던 요동 동부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고조선 유민들은 훗날 남하해오는 부여인들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건국하거나 옥저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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