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8. 20:44 세계사속으로1
10.이집트 신화 "오시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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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신화 "오시리스"
이집트 카이로 교외에 석양이 질 때 삼각형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채 검게 비치는 세개의 피라미드의 모습은 한마디로 장관이다.이 피라미드들은 약 4500년 전에 이집트에 군림한 세 왕의 무덤이다.옛날 주변에 있던 궁전이나 신관의 저택.요새 등 벽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은 거의 없어졌지만 돌로 쌓은 왕의 무덤은 오는날까지 남아 있다.기제의 북동쪽에 있는 이집트의 최대 피리미드는 높이가 137미터.가로.세로가 각각 230미터. 평균2.5톤의 돌이 230만개나 쌓아올려져 있으며 그 가운데는 16톤의 돌도 사용되었다고 한다.2.5톤의 돌이라면 요즘 트럭1대에 1개만을 실을 수 있는 큰 돌이다.이집트인들은 이 같이 큰 돌을 어떻게 깎았을까? 당시에는 청동기와 철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였다.따라서 돌로 만든 망차와 부드러운 구리로 만든 정과 톱이 사용되었다.능수능란한 석공들은 돌의 눈을 유심히 주목한다.나무에도 눈이 있듯이 암석에도 암석을 자르는데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 돌 눈"이 있다.석공들은 돌망치로 눈의 방향에 구멍을 깊게 판다.구멍이 패이면 이곳에 단단한 나무로 만든 쐐기를 박는다.그리고 위에서 물을 가만히 부으면 잠시 후에 나무가 팽창하는 힘에 의해서 돌 눈이 쪼개져 나온다.석공들은 이같이 소박한 방법으로 몇 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을 잘랐다.피라미드 밑에 깔린 돌은 기제 부근에서 구했다.그러나 곁에 있는 아름다운 석회암은 나일강 강가에서 구해 배로 실어왔다.돌을 아름답게 깎고 다듬는 데는 청동보다 부드러운 구리톱이 사용되었다.자르는 부분에 수정가루와 특수모래를 바르고 물을 뿌리면서 자른다.이렇게 가공된 돌을 사막 위에 바로 쌓아 올리면 무너져 버릴 것이다.그래서 사막보다 높은 암석지대를 평평하게 고른 후 피라피드를 그 위에 쌓는 것이였다.암석지대를 평평하게 깎기 위해 석공들은 피라미드를 4각으로 에워싼 입 구 口 자 모양의 수로를 어망의 눈처럼 가로.세로로 파 이 곳에 물을 붓는다.수면을 기준으로 암석을 평평하게 깎는 것이였다.
현대의 기술로 이 수평면을 측량해보면 각 모퉁이의 오차는 20센티미터.방위의 오차도 단지 2도에서 3도에 불과하다.고대의 기하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정확히 다듬어진 암석지대 위에 돌 230만 개를 어떻게 쌓아 올렸는가이다.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자렛대 원리에 기초한 특수한 목제기구를 사용 해 한 단씩 한 단씩 쌓아갔다고 생각했다.1년에 3개월 동안 10만 명이 동원되어 돌을 잘라내고 운반하고 길을 닦는 데도 10년.왕의 유해를 묻는 현실을 만드는데도 10년 .그리고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는데 20년. 총 40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동원된 인원은 많은 노예들이라고 주장하였다.그러나 현대 미국의 고고학자들은 헤로도투스가 추정한 사실은 이집트 안내인의 과장된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주장한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수는 4천명 정도이고 그들의 신분은 노예가 아니라 공공사업에 징발된 자유인이었다고 추정했다.노동은 매우 고됐지만 왕을 위한 노동에 줄거움을 찾은 시민들도 많았다.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 가운데서 "기분좋게 집으로 돌아가 마치 신을 위한 근사한 제사 때처럼 빵을 배부르도록 먹고 맥주를 마셨다" 는 기록이 있다.시민들은 20명이 한 조를 이뤄 수 톤이나 되는 돌을 통나무 두 개를 나란히 깔고 삼나무 열매기름을 부어가며 수례에 실어 끌면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무거운 돌을 운반할 수 있었다.이 방법은 지금도 정원사가 정원석을 옮길 때 쓰이고 있다.
이집트에서 미이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피라미드가 건설된때 이지만 완벽한 미이라 제조법은 기원전 1500년 경으로 알려지고 있고 그때는 이미 피리미드의 건설은 중단된 상태였다.이집트에서 거지들의 유해는 변변치 못한 삼베를 몸에 둘러싸아 공동묘지에 묻었다.이렇게 묻힌 거지의 유해는 건조한 날씨 덕분에 자연적으로 미이라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죽더라도 인간의 육신은 썩지 않고 남는다는 이집트인의 사고방식은 내세를 믿는 강한 신앙이 되었다.지상에서의 생명은 일시적인 것이며 육신의 죽음으로부터 제2의 영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왕은 물론이고 노예까지도 자신의 사후 생활에 대해서 생각했다.이집트인이 죽은 사람의 유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는 신화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바로 이집트인이 좋아하는 "오시리스 신화" 이다.
"땅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투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오시리스 는 자비로운 왕으로서 지상의 모든 인류를 지배해 그들을 미개상태에서 문명으로 인도하고 있었다.그러나 오시리스 동생 세트는 이를 질시해서 계락을 꾸며 오시리스를 상자에 집어넣고 나일강에 떠내려 보냈다.오시리스의 헌신적인 아내 이시스는 고생 끝에 지아비의 유해를 찾아내서 이집트로 돌아와 관을 지키면서 아들 호루스를 낳았다.세트는 또다시 오시리스의 관을 찾아내 산산조각내고 이집트 각지에 뿌렸다.그러나 이시스는 다시 정성들여 모아 본래의 모습으로 만들었다.태양신 라는 사자(死者)의 신 아누비스에 명하여 오시리스 유해를 미이라로 만들게 하였다.이시스는 자신의 날개로 오시리스 미이라에 바람을 불어넣어 소생시켰다.소생한 오시리스는 죽은 사람들의 왕이 되었다.성장한 아들 호루스는 세트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역경을 극복한 끝에 오시리스 의 왕위를 이었다.헬리로폴리스 의 산이 주재한 재판은 호루스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이 신화는 왕이 사후에 부활하여 신이 주재하는 세계의 왕이 되어 영원한 일생을 보낸다는 이집트인의 내세관을 보여준다.불사신으로 간주되는 사람은 처음에는 왕과 그 가족뿐이었다.피라마드는 바로 그 왕들의 무덤 으로서 사후의 주거지로 만들었던 것이다.이집트에서 피라미드가 만들어지기 전의 무덤은 마스타바였다.마스타바와 주거지는 모두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제조법을 배워 마른 벽돌로 만들었다.이집트 고왕국 제 3왕조의 왕 제세르가 계단식 피라미드를 처음으로 만들었을 때부터 신의 영원한 주거지는 돌을 쓰게 되었다.이후로도 왕궁의 주거지는 마른 벽돌을 사용했지만 피라미드와 신의 영원한 주거지 신전은 돌로 만들게 되었다.현재 이집트에는 약 80개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다.이집트 3000년 역사속에서 피라미드가 한창 만들어진 것은 500년간 고왕국시대에 불과하다.그이후의 시대에서는 파라미드를 만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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