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안소니백세건강노트 :: '세게사속으로2' 카테고리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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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게사속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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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문명과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인도대륙의 북서부에 인더스강이 흐르고 있다.히말라야산맥에서 시작되어 펀잡지방을 지나 아라비아해에 이르는  큰 강이다.인더스강 유역에는 강우량이 적어 불모지가 많다.평야지대라고 하더라도 군데 군데 밀밭이 흩어져 있다.인더스강 하류에 있는 황량한 언덕위에 벽돌로 만든모헨조다로 유적이 나란이 서있다.이렇게 황량한 지역이 어떻게 세계4대문명의 발상지가 되었을까?사막과 같은 이 지역도 기원전 3000년 경에는 비가  많이 오는 울창한 삼림지대였다.인더스강 유역의 고대도시에는 가마에서 구운 벽돌을 대단히 많이 사용했다.점토에 모래를 섞어 짓이겨 굳힌 것을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어 가마에 구우면 벽돌이 완성된다.현재에도 벽돌 공장은 인도 각지에 서 있다.공장에는 철로 만든 굴뚝 하나가 서있다.도시를 건설하는데에는 벽돌이 많이 사용되었다.벽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료가 되는 나무가 대량으로 필요했다.인더스강 유역의 울창한 삼림의 나무는 이런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인더스강 유역에는 호랑이.물소.코끼리.코뿔소 등으로 밀림과 늪지대에 사는 동물이 많았다는 흔적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기후변화도 인더스강을 메마르게 한 원인이 되었다.대서양의 저기압이 북아프리카를 지나 인더스강에 비를 뿌려주었으나 오늘날에는 저기압이 방향을 바꾸어짐에 따라 비가 오지않아 메마른 풍토를 가져다 준 것이다.특히 몽고군의 칩입으로 바빌론지역의 관개용수로의 파괴는 결정적으로 이 지역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렸다.인더스문명의 유적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60곳 이상이 발견되었다.강 하류에 있는 모헨조다로와 650킬로미터 위쪽의 펀잡지방에 있는 하랍파기 대표적인 유적지대이다.19세기 후반부터 알려진 이 유적들은 유적지대 인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과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인들에 의하여 파괴된 것은 놀라운 일들이었다.마을사람들은 집을 짓기 위해서 유적의 벽돌을 가져다 쓰고있었다. 더 난폭한 발상은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서 철도 아래에 까는 자갈로 이용하기 위하여 고대유적의 벽돌을 이용한 것이였다.1천 킬로미터가 넘는 구간에 고대도시의 유물이 개발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사용되었다.영국인들은 인류의 중요한 유산을 파괴해버린 것이었다.21세기에 들어서서 모헨조다로와 하랍파의 유적에서 도장들이 발견되었다.한 변의 길이가 2센티미터 내지 4.5 센티미터인 사각형 활석이다.그 위에 물소와 코뿔소의 동물과 그림문자가 새겨져 있었다.모헨조다로에서 1200개 이상.하랍파에서 330개가 발견되었다.그림문자의 종류는 400개나 되었다.도장의 발견으로 인더스강 유역에 같은 문자를 사용한 인류가 존재했음이 밝혀졌다.이로서 지금까지의 인류문명발상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이어 인더스문명이 하나 더 보태게 된 것이다.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문명을 쌓아올린 종족은 수메르인이었다.그들 도시의 중심은 신에게 제사지내는 신전이었다.이곳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지식이 많은 장로가 제사를 주재했다.신관직은 대대로 이어져갔으면 신관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었다.마침내 그들은 왕이 되어 신전과 궁전을 건축했다.이집트의 왕실도 이러한 대표적인 문명이 태동시킨 것이다.

 

 

 

 

 

 

 

 

 

 

 

 

 

 

 

 

 

 

인더스문명도 다른 고대문명과 같이 반드시 신전이 있을 것이라고 발굴팀은 생각하게 되었다.발굴이 시작되고 3년이 지난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모헨조다로 성벽의 북쪽에서 동서의 길이가 23미터 남북이 55미터나 되는 건축물이 발견되었다.이는 여러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수영장 규모의 목욕탕인 것으로 추정되었다.동쪽에 있는 우물로부터 물을 끌어왔던 것으로 보인다.더러운 물은 서쪽으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고 남쪽과 북쪽에는 계단이 있다.이는 5천년 전의 유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아주 튼튼한 내부구조를 갖추고 있었다.오늘날에도 인도의 영험한 곳에는 사각형 연못이 있다.인도인은 이러한 곳에서 목욕하는 관습이 있다.이러한 관습을 보더라도 이렇게 큰 목욕탕은 단순한 몸을 씻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게 된다.이것은 목욕재계의 의미를 가진 종교적인 행사를 하기위한 장소로 여겨진다.인더스문명에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와 같은 신전이나 궁전은 발견되지 않았다.따라서 이와는 다른 신권정치가 펼쳐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모헨조다로의 거리를 걸어가면 집집마다 우물이 있다.이 우물들은 윗부분을 겹겹히 쌓아간 것으로 나타난다.이것은 인더스강이 여러 번 홍수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말해준다.홍수가 날 때마다 모래와 진흙이 우물에 쌓이기 때문에 우물에 모래와 진흙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우물 입구를 더 높히 쌓은 것이다.홍수로 부서진 집위에 새 집을 얹고 개축된 형식으로 매번 다시 재건된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각각의 집에는 우물.목욕탕.양변기식 화장실이 있다.오물은 배수관을 통해 집 밖에 있는 오물통으로  나간다.오물통에 있는 쓰레기는 밑바닥에 가라앉게되고 위에는 액체만 남게된다.이 액체만 도로 밑에 벽돌로 설치한 하수구로 흘러보낸다.나머지는 시의 위생담당부서에서 정기적으로 수거해 간다.로마문명 이전에 이만큼 휼륭한 하수처리 시설을 갖춘 문명은 찾아볼 수 없다.또한 두터운 벽 가운데 쓰레기 처리용 배수관이 들어 있다.이 배수관은 2층에서 1층으로 통한다.현대 고층건물에서 쓰레기를 아래로 떨어뜨리는 굴뚝처럼 생긴 더스트 슈트와 같다.배관을 통해 쌓인 쓰레기는 역시 시의 위생담당부서에서 치운다.이런 사실을 보아 인더스문명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청결하고 위생적인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또한 계획적인 도시계획을 실시하는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행정기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인더스 문명에서는 다른 문명과는 달리 무기류가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 점이다.이러한 사실은 인더스문명을 지탱한 힘이 무기와 권력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강력한 군대가 아니었다면 어떠한 힘으로 사람을 통제했을까 수수께끼 처럼 의문이 생긴다.인더스문명이 발견된지 반 세기가 자났음에도 불구하고 문자는 아직까지도 해독되지 못했다.문자의 수는 400종류에 이른다.이렇듯 인더스문명에는 해명되지않은 역사적 사실이 많다.도장에 새겨진 문자가 해독된다면 수수께끼는 어느 정도 해명될 것이다.이러한 가운데서도 단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그것은 인더스강 유역에 있는 하나의 민족이 중심이 되어 거대한 도시문명을 구축했으며 이 문명은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인에 의해서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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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대왕과 페르시아 제국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는 이란 남부의 파르스 지방에 위치했던 고대 도시와 그 유적으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수도였다. 고대 페르시아 수도답게 거대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페르시아만에 인접한 파르스는 페르시아인의 고향이다.이곳의 중심지 시라즈는 재그로스산맥 가운데 높이가 1500미터나 되는 분지에 있다.분지의 끝에 수목이 없는 바위산에 다리우스대왕이 건설한 페르세폴리스궁전의 유적이 있다.페르세폴리스궁전이 건축된 파르스지방은 북쪽에 있는 바르미아호수 부근에 정착한 이란계 유목민 가운데 한 종족이 재그로스산맥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횡단해 당도한 곳이다.그들이 남하한 때는 기원전 700 년 경이었다.페르시아인은 10개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이 10개의 부족을 통일한 사람은 아케메네스로 아케메네스 왕조를 열었다.그의 후손인 키로스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이끌었다.페르시안들은 신이 늘 천개의 귀와 만개의 눈으로 온세계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면 엄한 벌을 내린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기원전 522년 9월29일 밤 페르시아 제국 2대왕 캄비세스2세의 이집트 정벌에 따라나섰던 7명의 귀족이 파사르가디에 있는 왕국의 문을 통과하여 왕위찬탈을 시도한 무리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궁정으로 들이닥쳤다.이들은 캄비세스왕을 속이고 즉위한 가우마타 일당을 모두 살해한 후 민중들에게 이들이 가짜임을 알렸다.당시에 캄비세스 2세는 이디오피아 원정에 실패하자 자책감으로 자살하고 말았다.비어있는 왕의자리에 7명의 귀족들이 상의한 결과 아케메네스의 후손인 다리우스를 페르시아 제3대왕으로 선출하였다.당시 다리우스는 28살이었다.왕으로 선출된 다리우스는 페르시아를 창건한 키로스왕의 두 딸과 결혼 했다.이후 그는 페르시아제국의 영광과 함께 대왕으로 불리웠다.즉위한지 2년 동안에 19회나 전쟁을 치렀으며 반란을 일으킨 9명의 제후를 진압해 페르시아제국의 영광을 되찾았다.바그다드에서 테헤란으로 향해 동서무역로가 있는 재그로스산맥의 길목에 있는 바위산을 깎아 거대한 기념비문을 새겨넣었다.그 비문에는 다리우스대왕의 업적이 고대 페르시아어.엘람어.바빌로니어 등 3개국 설형문지로 적혀 있다.다리우스대왕은 서쪽으로는 소아시아 리디아와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동쪽으로는 인도와 펀잡지방까지 대제국을 쌓아올렸다.

 

 

 

 

 

 

 

 

 

 

 

 

광대한 영토를 유지히기 위해 수도 수사에서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사르테스 거리에 이르는 군용도로 "왕의 길" 2683 킬로미터를 건설하였다.이전에 90마일 걸렸던 길을 불과 7일만에 달릴 수 있게 되었다.해상교통로에도 힘을 기울여서 3단의 해상 운송선 두 척이 나란이 지날 수 있고 4일 동안의 항해로 통과할 수 있는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를 팠다.후에 수에즈 운하를 건설할 때 발견된 페르시아왕의 비문에는 "배는 우리 뜻대로 이집트에서 이 운하를 지나 페르시아에 도착했다" 라고 새겨져 있었다.다리우스대왕은 제국을 20주로 나누어 주지사를 임명하고 해마다 공납해야 하는 조세액을 정했다.페르세폴리스궁전의 신년 하례식에는 다리우스대왕이 지배한 23개 민족의 사절단이 줄지어 몰려왔다.티그리스유라테스강 주변에 사는 엘람인은 모자대신 끈을 둘둘 말고 암사자와 두마리의 새끼사자를 끌고.아프가니스탄의 아라코시아인은 물주전자와 낙타를.이집트인은 큰 소와 직물을.바빌로니아인은 귀금속과 들소를.인도의 칸다라인은 회살과 창 그리고 들소를.아라비아인은 직물과낙타를.이디오피아인은 항아리.상아와 기린을 이끌고 궁전으로 들어왔다.이 궁전에서 왕의 일족을 포함하여 날마다 1만5천명이 식사를 했기 때문에 그 비용도 엄청나게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페르시아인들은 불을 숭배하는 민족이었다.그러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접하면서 여러 자연신들까지 숭배하게 돠었다.신들에 대한 의식은 마기라는 사제들에 의해서 집행되었다.이러한 종교적 의식은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러 예언자 조로아스터에 의해 신학과 우주관을 갖춘 종교로 재조직돠었다.우주 최고의 신 아후라 마즈다는 모든 신을 지배하는 신이다. 어둠과 악의 신인 아리만은 악령 다에바스를 지위하여 모든 선을 위협한다고 규정했다.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선과 악은 서로 싸우게 돠는데 승자는 후라 마즈다이다.악한자는 세상의 종말 후 고통을 받으며 선한자는 천상에서 축복을 받으며 살게 된다고 한다.다리우스대왕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조로아스터교는 계속 발전하여 태양신 미트라가 인간의 구원을 돕는 신으로 추가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문자로는 알파벳 형태로 쓰여진 아랍어가 제국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다.다리우스대왕이 살아 있던 페르시아제국은 훌륭한 통제력과 페르시아인의 단결로 유지되었으나 대왕이 죽자 대신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200여 년 동안 영광을 누린 페르시아제국도 기원전 330년에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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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제국의 영광

 

 

 

 

 

 

 

 

 

 

 

 

 

오늘날 이란인이라 불리우는 인도.유렵어족 일파는 기원전 2천년 경 중앙아시아에 출현하였다.그들은 기원전 1천년 경에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부지역에 이르렀으며 그곳에 정착하여 고대 오리엔트 문화를 흡수하였다.기원전 7세기에는 이란인의 일파인 메디아인들이 앗시리아로부터 독립하여 국가를 세웠다.그들은 카스피해에서 다뉴브강 유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던 스키티아인들을 격파하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지배하였다.이후 메디아 왕국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자그로스산의 동쪽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는 이루지 못했으나 혈연 관계에 의한 중앙권력과 연결된 속주들이 합해진 연방체였다.기원전 612년에 이르러  앗시리아를 붕괴시키기 위해 바빌론인들과 연합할 정도로 그 위세가 커지게 되었다.앗시리아가 멸망하지 메디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중앙아시아에서 리디아 왕국과 경계인 소아시아 힐리스 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그러나 메디아 왕국은 이에 만족치 않고 아스티아케스왕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장악하려들자 신바빌로니아 나보니두스왕은 아스티아케스왕의 손자인 아케메네스 왕가의 키루스와 동맹을 맺고 메디아 왕국에 대항하였다.기원전 559년에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케스왕은 키루스에 의해 축출되었다.왕국의 지배권은 아케메네스 왕가로 넘어가서 페르시아 왕국이 시작되었다.그러나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은 근본적으로 같은 아리아 민족이었으므로 실제적인 큰 변화는 없었다.

 

 

 

 

 

 

 

 

 

 

 

 

 

 

 

여세를 몰아 키루스왕은 중앙아시아와 중동지방 전체를 통합하는 대정복 사업에 착수하였다.소아시아의 리디아 왕국을 정복하였고 소아시아 해안 지대의 그리이스 도시들을 정복하였다.이때가 기원전 540년 경이다.기원전 539년에는 오리엔트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하여 바빌론으로 진격하였다.그러나 키루스왕은 앗시리아 멸망의 교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히 정복한 영토들에 대해 지극히 관대한 정책을 펄쳐 정복지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주었다.헤브라이인들과 그 밖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해방자로 간주되었던 것도 그의 관용정책이 통했기 때문이었다.키루스왕이 이집트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즉위하고 나서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정복사업을 이어나가 이집트를 페르시아에 병합시키고 자신은 이집트 제 27왕조의 왕이 되었다.그러나 왕이 이집트에 머무르는 동안 본국에서 왕위 찬탈 사건이 벌어지고 자신이 진두 지휘한 이디오피아 원정에서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본국에서 왕위 찬탈사건을 수습하고 새로운 왕위에 오른 사람은 다리우스1세(기원전 522-486년) 였다.그는 후에 그리이스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그의 치세하에서 페르시아는 인도에서 트라키아에 이르는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을 만들었다.당시에 페르시아를 물리친것은 오로지 그리이스 뿐이었다.페르시아 속주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에서 페르시아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연결하는 대로는 그 거리가 1600마일에 달했다.경제 생활에 있어서는 표준적인 도량형이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다.지방세는 다릭이라고 불리는 금화로 징수되었다.페르시아인은 세금이 면제되었다.페르시아왕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주요 신들의 대리자로 간주되었다.또한 페르시아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여러 곳에 수도를 세웠다.수사나 페르세펠리스는 대표적인 도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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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세계의 왕 최초의 세계제국

 

 

 

 

 

 

 

 

 

 

 

앗시리아인들은 남쪽의 바빌로니아왕국이 강력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지배하에 있었다.그 고난의 시대는 실로 1천 년 가까이 계속되었다.앗시리아가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등장한 때에는 기원전 1000년 경이었다.철의 왕국 힛타이트왕국이 더 강한 철기문화를 가진 프리키아인에게 멸망당하고 난 이후 맨 먼저 제철법을 배워 철제무기로 강한 군대를 무장시켰다.두 마리의 말이 끄는 2륜마차는 기동성이 뛰어나 기병대와 함께 위력을 발휘했다.도시의 성벽을 파괴하는 공성기도 개발했다.기원전 670년에 이집트를 정복하기에 이르면서 오리엔트 전 지역을 제패하고 사방세계의 왕이 되면서 앗시라아를 최초의 세계제국으로 만들었다.앗시라아 새 수도 니네베의 대궁전에 는 전쟁 포로와 반란자를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하는 장면을 그린 큰 벽화가 걸려 있다.각국의 사자들은 이 벽화를 보고 앗시리아에 반항하면 매우 잔혹한  처벌에 직면할 것임을 간파하고 돌아갔다고 한다.정복지의 주민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그 곳에 다른 지역에서 끌고온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이주정책도 시행했다.앗시라아는 수메르.악카드인에의해 시작되고 바빌로니아인에 의해 발전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계승하였다.앗슈르반아플리왕은 과거의 문헌을 보관할 거대한 도서관을 세우고 서기들은  정확한 사본을 편집하고 거대한 비판적인 주석을 써 넣었다.또한 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연대기도 편집되었다.천문학.수학 등의 학문연구가 활발하였으며 식물학은 왕들이 큰 관심을 가진 분야였다.앗시리아인들은 과거의 문명과 인근의 문명이 사용하던 소재들을 독창적으로 종합하여 고도로 발달된 예술품을 남겼다.대궁전의 건축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벽돌과 힛타이트의 석재를 함께 사용하였다.궁전은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부조로 장식했는데 그 묘사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였다.

 

 

 

 

 

 

 

 

궁전이나 성벽의 문에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거대한 날개가 달린 황소의 거상이 버티어 서서 한층 더 위엄을 더해 주었다.이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후대에 계승되어 페르시아 문명의 한 요소가 되었다.앗시리아의 전성시대는 기원전 7세기 중엽 앗슈르반아플리왕 시대였다.그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 원정군을 파견해 지배를 강화함과 동시에 학문과 에술을 장려해 문화향상에도 힘썼다.수도 니네베에 건설한 거대한 도서관에 앗시리아 제국의 기록만이 아니라 옛날 수메르인과 악카드인 시대의 기록도 모아두었다."나는 수메르의 그림과 같은 문자와 이해하기 어려운 악카드어를 읽는 법을 배웠다.악카드어를 완전히 읽고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기 전부터 있던 비석을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읽을 수 없어서 속태우고 노여워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문자에 홀린적도 있었다" 이것은 왕 자신이 쓴 문장이다.그는 지난 역사를 애써 배우기를 좋아한 왕인 듯하다.그러나 앗시리아도 그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이란 고원에서 새로히 등장한 메디아인과 오랜 역사를 가진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으로부터 공격받고 기원전 612년에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앗시리아의 도서관과 궁전은 함께 사막에 파묻힌 이래 2천 수백년 동안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았다.그러다가 마침내 19세기 중엽 에 영국의 학자가 이것을 발견하게 된다.점토판에 적힌 2만 7천점에 달하는 귀중한 기록은 현재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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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초승달 지역  앗시리아 제국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란 서쪽으로는 지중해와 맞닿고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막과 접하며 북으로는 타우르스 산맥그리고 동쪽으로는 자그로스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이 지역 내에서도 지중해  연안지역 특히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은 매우 비옥하였다.그리이스인들은 이 지역을 "강과 강 사이에 있는 땅" 이라는 뜻으로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렀다.이 지역은 인류 역사상 초기부터 문명 발달의 중요한 본산지였다.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많은 도시국가들이 탄생했다.앗수르도 그 중의 하나이다.이 도시는 티그리스강 유역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와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앗수르라는 이름은 이 도시를 소유한 태양신 앗수르에서 유래한 것이다.앗시리아인이라는 민족도 앗수르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앗시리아인은 아모리인과 바빌로니아인과 같은 셈족 계통의 민족이다.앗시리아인은 고대 세계의 무대에 거의 드러내지 않다가 기원전 1400년 경 후리인들이 지배하던 마탄니 왕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틈을 타서 그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앗시리아인들은 제국을 건설하고 티쿨티니누르타 1세(기원전 1242-1206) 때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바빌로니아를 단숨에 정복해버렸다.기원전 1200년 경에 철기를 사용하는 아랍인들의 칩입으로 인해 앗시리아의 팽창정책은 잠시 중단되었다.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는 후리인과 연관이 깊은 우라르투인과 철의 왕국 힛타이트를 붕괴시킨 새로운 철기문화의 주인공 프리키아인 등이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난관속에서도 앗시리아인들은 아다드나라리 2세(기원전 911-891년) 때에는 서쪽으로 정복사업을 이어갔고 나시르 아플리2세(기원전 883-859 년) 때에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주요 도시인 카르세마쉬를 정복하고 지중해까지 진출하여 페니키아 연안 도시들을 조공국으로 만들었다.이어서 그의 아들 살마나사르3세(기원전 859-824년)에는 다마스커스를 차지하고 이어서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잠시 우라르투인에게 바빌론을 빼았겼으나 기원전 746년에서 727년까지 티글라트 필레세르3세는 우라르투인을 격파하고 시리아를 탈환하여 바빌론의 왕이 되었다.앗시리아왕은 앗수르 신과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의 대리자로서 위엄을 만방에 떨쳤다.이후 샤르곤 2세 때에는 이스라엘 왕국 사마리아를 파괴하였다.이어서 프리키아인들을 멀리 밀어내고 키메라아인들의 칩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그의 후계자 센나케리브(기원전 706-681년) 왕은 유다왕국을 제후국으로 만들고 유프라테스강변에 니네베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중심지로 삼았다.앗시리아는 강력한 정복사업으로 비록 단기간에 그쳤지만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통합하여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민족이 되었다.그러나 정복 일변도의 확대정책은 내실을 굳히지 못하였고 잔혹한 정책으로 정복지 주민의 신용을 얻지 못하였다.기원전 612년에 북쪽의 새로운 강국인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의 합동으로 니네베 시가 함락되고 뒤이어 리디아.이집트등 여러 왕국이 칩입으로 앗시리아제국은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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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H안소니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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