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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2.22 19.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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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

 

 

 

 

 

 

 

 

 

 

 

헤브라이인들은 농경 민족으로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 같은 왕궁과 사저 외에는 농촌 지역이었다. 농촌은 점점 분산되어 최소 300명에서 최대 500명까지의 인구를 가진 촌락이 되었고 멀리 떨어져 한 가족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집단도 적지 않았다.이렇게 헤브라이 공동체는 적은 수의 구성원을 가진 공동체로 성장하였다.가나안 사람들은 중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2100에서 1550년 경으로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후기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1550에서 1200년 동안에 가나안의 대부분은 이집트 신왕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을 형성했다.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로 가나안은 혼란에 빠졌고 이집트의 지배권은 완전히 무너졌다.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1200년경의 고대 이집트 비문인 메르넵타 석비에서 처음 언급된다.이스라엘인의 조상은 이 지역에 뿌리를 둔 고대 셈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추정된다.현대 고고학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인과 그들의 문화는 가나안 민족과그들의 문화에서 발전된 독특한 단일신 신앙을 통해 분리되었다.이들은 성서 히브리어로 알려진 고대 히브리어를 사용했다.기원전 1200년경 무렵 기후 변화와 사회 변화로 인해 고원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도시인들에게서 곡물을 사먹던 유목민들이 도시들이 쇠락하자 곡물을 자체적으로 생산해야 됨으로서  정착 생활로 바꾸어 정착하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시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유목민이 주류였지만 가나안의 도시 왕국들에서 이탈한 사회 하층민 계층 하비루 역시 초기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스라엘이 메르넵타 비문에 등장한 시기인 기원전 1200년경과 비슷한 시기부터 블레셋 사람들은 남쪽 해안 평야에 정착했다.헤브라이 왕국은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기원전 961-922 년)왕 치세에서  가장 큰 번영을 누렸다.페니키아의 항구 도시인 튀르와 동맹을 맺고 당시 페니키아 왕 히람1세는 예루살렘의 성곽.궁전.사원 등의 건립을 후원하였다.대신에 히람1세는 예루살렘을 통과하여 홍해로 진출할 수 있었다.그로 인해 예루살렘은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하게 돠었고 홍해 근처의 구리 광산을 히람1세와 공동으로 개발하면서 왕실의 재정도 나날이 풍족해졌다.솔로몬왕은 통일 왕국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부족 체제를 해체하고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개편하자 각 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무리한 세금을 징수하였다.이러한 일들은 솔로몬왕이 생존해 있는 동안은 그런데로 지속되었으나 왕이 사망하자 그 모순은 노골적으로 드러나 사회적 불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북부의 부족들은 솔로몬왕의 아들 르호보암이 새롭게 즉위하자 강제노역과 세금을 줄여달라고 요구하였다.그러나 르호보암은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오히려 더 큰 압박을 가하였다.북부의 10개 부족은 사마리아 시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반면에 남부의 두 부족은 여전히 예루살렘의 왕에 대한 충성을 계속하였는데 이 국가를 유다 왕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헤브라이인들은 이 두 왕국으로 갈라져 싸움을 거듭했으나 이스라엘 왕 아합과 유다 왕 요사파테가 동족간의 분쟁이 무익함을 깨닫고 동맹을 맺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이 두 왕국은 9세기 당시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여러 강대국들간의 세력 균형으로인해 독립을 유지해 갈 수 있었다.그러나 다음 세기에 이르자 세력들의 균형이 무너지며 앗시리아가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면서 결국 기원전 722년에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여 중심도시인 사마리아를 파괴하고 이스라엘 지도자를 포로로 잡아갔다.한편으로는 남부의 유다 왕국은 앗시라아의 속국으로 전략하였지만 공식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하였다.이렇게 강세를 떨치던 앗시라아도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에 의하여 정복돠고 말았다.유다 왕국은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처절한 저항을 벌였으나 기원전 586년에 붕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바빌론에 끌려가 억류 생활을 하게 되었다.이로서 사울왕에서 시작된 헤브라이 왕국은 붕괴되고 말았다.포로로 잡혀간 헤브라이인들은 페르시아  왕 키루스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인 기원전 539년에야 예루살렘에 돌아올 수 있었다.헤브라이인들은 바빌론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전통을 고이 간직하였다.팔레스타인에 돌아온 이 후로는 점차 부족주의를 버리고 유다족을 중심으로 굳게 단결하였다.이후로 헤브라이인들을 유다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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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H안소니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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