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23. 15:00 바람풀잎처럼2
6.디바 마리아 칼라스
●디바 마리아 칼라스(1923.12.02. ~ 1977.09.16.)
1977년 9월16일 53세의 일기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여신. 그녀의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로 알려졌지만 극심한 공허와 고독이 몰고온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보고 있다.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칼라스.그녀의 죽음은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그리고 어찌하여 이 세기의 여신이 그토록 쓸쓸하고 허무하게 세상을 버렸는지 통탄했다." 마라아 칼라스는 오후 1시 반쯤 죽었고 이미 관 속에 있었다.아주 아름다웠다.얼굴의 일부는 푸른색이었다.약 때문에 심장에 이상이 온것이였다.그녀는 간편한 차림으로 머릿단을 옆으로 내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신비했다.그것이 바로 칼라스의 본래 모습이었다." 그녀의 시신을 지켜본 한 사람의 표현이다.그녀의 둘도없는 오페라 파트너 스테파노는 칼라스의 마지막을 지켜보면 이렇게 말했다."칼라스는 노래를 잘 하는 여자였다.사랑과 성공의 인생을 살다 그것을 잃고는 세상을 버린 것이다." 스테파노의 말대로 사랑과 성공의 인생을 살다 그것을 잃자 세상을 버린 여자, 그것이 킬라스의 자존심이고 세상을 향한 비수였다.결코 비참하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여신의 품위를 지키기위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았던 디바 마리아 칼라스! 그 이름은 20세기 성악계의 신화이다.女神이란 뜻의 "디바(Diva)"라는 호칭으로 불릴 만큼 세계 성악사에서 두 번 다시 어려울 빛나는 여인....세상을 떠난지 46년 거의 반세기 가까워지고있는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가슴속에 살아있는 프리마돈나! 여인으로서는 더없이 불행했던 여자! 그래서 더욱 안쓰러움을 느끼게 하는 여자! 그녀는 1923년 12월2일 뉴욕 맨하튼의 웨스트사이드 병원에서 태어났다.그리스에서 약국을 운영하다가 파산해 미국으로 건너온 부모가 성을 칼라스로 바꾸고 1년후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마리아 칼라스이다.그녀의 어린 시절은 양지보다는 늘 그늘에 가까운 것이였다.뚱뚱하고 못생긴 근시안의 소녀, 훗날 그녀는 자신의 소녀 시절을 늘 그렇게 뚱뚱하고 촌스러웠으며 귀엽지 않았던 미운 오리새끼였다고 회고하였다.비만과 못생긴 외모로 인한 부모의 무관심은 훗날 칼라스가 초인적으로 다이어트를 감행할 정도로 강박 관념이 되어버렸고, 사랑에 대하여 자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기질로변했다.
몸매가 나뻐서 예쁜옷에 안맞는 그녀는 노래는 정말 잘했다.프랭크시내트라, 폴 포터의 노래와 멕시코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가수가 되고싶었던 자신의 꿈을 딸을 통해 실현하려는 이혼한 어머니의 야망 덕분에 칼라스는 아테네 음악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그 곳에서 첫 번째 스승 엘비아 데 이달고를 만난다.이때 이달고는 "마리아의 노래를 처음 듣는 순간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풍부하면서 극적인 감흥이 가득한 사나운 폭포같은 음성이라는 것을 느꼈다.그후 마리아는 고음을 내는 방법에 많은 흥미를 갖고 집요하게 공부했고 스스로 목소리의 한계를 극복해갔다."고 토로했다.이달고와만난지 6개월만에 아테네 국립오페라단과 전속을 맺고, 1941년 전쟁의 와중에서 영화관에서 " 성 "이란 작품으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이어 주피의 "보카치오", 그 이듬해는 " 토스카 "를 맡았다.당시에 칼라스의 몸매는 오페라 가수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을 정도로 볼품없이 뚱뚱했고 목소리도 곱지 못했다.이런 그녀가 약점을 극복하고 강렬힌 음색, 엄격하면서 정밀하게 조탁된 음악성, 투명하면서도 극적인 힘을 발휘하는 격렬함, 천재적인 영감의 번뜩임을 한 몸에 지닌 오페라 가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오로지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가 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테네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던 칼라스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1945년 아버지가 있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다.그러나 그녀의 재능을 알아주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그런 그녀를 알아챈 사람은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이었다.세라핀은 칼라스의 잠재력을 한 눈에 알아보고 " 라 조콘다 "에 칼라스를 추천했고, 1947년에 공연된 베로나 극장의 " 라 조콘다"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며 칼라스는 단숨에 유렵 무대에 알려졌다.성공 이유는 간단했다."라 조콘다"의 무대는 사상 최대의 야외 무대였는데 그녀의 성량은 대단했고 모든 걸 완전하게 압도했다.영국에서라면 굳히 목소리가 클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만 흥분하기를 잘하는 이탈리아에서는 결국 그녀가 관중에게 승리한 것이다.운명적인 도시 베로나에서 세라핀과 만난 칼라스는 많은 것을 배웠다.영혼으로 음악을 들으면 인상갚은 제스처가 저절로 나온다고 그녀에게 음악에 충실하라고 강조했다.베로나에서 이탈리아 중년 사업가 메네기니와 만난 후 정상을 향한 발돋움을 시작한다.1949년 베로나의 카톨릭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그녀는 메네기니의 후원으로 스타덤에 오른다.칼라스의 인생에서 단 한번 정말로 사랑했다면 아마 그 사람은 메네기니 였을 것이다.그는 남편이라기 보다 아버지나 오빠같은 존재였다.그러나 베네기니의 그러한 헌신은 훗날 칼라스의 배신으로 돠돌아올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1951년 12월 칼라스에게 행운이 왔다.갑자기 병이난 레나타 테발디 대신 아아다역을 맡아 드디어 스칼라에 입성하였다.객석에서 세라핀, 줄리니 같은 대자휘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라스는 단순히 곡예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장식음에 풍부한 감성과 극적인 효과를 불어넣는 등 철저한 자신만의 노르마를 연출해서 대성공을 거두웠다.이 공연을 통해 명성과 재능 등을 모두 갖추고 있는 비스콘티를 만난다.세라핀이 그녀에게 음악을 주었다면 비스콘티는 연기를 주었다.비스콘티는 연극적인 도든 것을 가르쳤고,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다.이제는 칼라스에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그녀의 전성시대 1952년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노르마 역으로 영국 청중을 열광시켰고 1954년에는 시카고 무대에 데뷔했다.이제 객석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경제.문화계 인사 1천여명이 자라잡고 리허설까지 마친 칼라스는 공연 도중 몸이 불편하다고 1막만을 공연하고 내려올 정도로 교만해졌다.이때 1952년에서 1954년 사이에 칼라스는 피나는 다이어트에 성공하게된다.오드리헵번이 주연한 "로마의 휴일 "을 보고 날씬해지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결국 칼라스는 90킬로그램에 육박하던 채중을 2년만에 37킬로그램이나 줄였다.그 결과 그녀는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헵번 스타일의 옷을 입을 수 있었다.그러나 발목 만은 살이 빠지지 않아 평생 동안 "카르멘"은 공연하지 않았다.굵은 다리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화려한 정상은 짧았다.악성 루머와 몇몇 중요한 공연들의 취소, 메트의 책임자와의 갈등 등으로 잇따른사건들이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고 그 결과 노래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언론의 혹평에 이어 선박왕 오나시스와 사랑, 다시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의 관계 등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칼라스는 1965년 7월5일 원숙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코벤트가든에서 "토스카" 공연을 마지막으로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 은퇴한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는 말처럼 그녀가 간지 거의 반세가가 가까워지고 있다.그러나 그녀의 명성은 사그라들 줄을 모른채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점점 더 해지는 느낌이다.그것이 바로 오페라의 새로운 세기를 열고 세상에 영원한 아쉬움을 남기고 간 "디바" 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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